나도 나를 모를 때는 과거를 돌아보자

by 보로미의 김정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시간이 있다면 과거를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었다. 그 사색의 시간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다.


군인이 된 나는 입대한 지 3주도 되지 않은 시점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왔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뭔가 대단한 깨달음의 순간은 없었다. 단지 군대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그동안 이 소중한 시간을 얼마나 낭비해왔는가 생각하니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나 싶었지만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쓰지 못하는 환경에 오자마자 알게 되었다. 시간은 그저 소중하다. 지혜가 부족한 나머지 왜 시간을 아껴가며 살아야 하는지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은 그저 소중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얼마나 시간을 낭비해왔는가! 자유로운 시간이 그제서야 간절해졌다. 나는 점점 더 시간을 아끼며 쓰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되면 바로 운동을 하거나 책부터 찾았다. 뭐라도 하면서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나의 시간을 빼앗는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렇게 화가 났다. 2년 가까이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지낸 나를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싶었다. 그만큼 내가 성숙해졌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책을 읽는 게 가장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믿었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책장에 꽂혀 있는 재밌어 보이는 책부터 읽었다. 어차피 무엇을 읽어야 할지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뭐라도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했던 독서는 무언가 얻기 위한 독서라기보다 독서를 위한 독서였다고 표현하는 게 옳다. 그저 책을 읽으면 무작정 생산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일단 계속 읽었다.


우리가 찾는 그 ‘무엇’도 나의 독서와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일을 위한 일, 독서를 위한 독서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계속 읽다 보면 점점 그 속에서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한다. 독서를 위한 독서가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한 독서로 바뀐다. 우리도 처음에는 ‘무엇'을 위한 무엇을 하다 보면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한 ‘무엇’이 될 수 있다. 시작부터 고귀한 목표로 책을 읽으려 하면 그 무게감 때문에 독서 습관을 잡기 어렵다. 우리의 일과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서를 계속 시도하다 보니 우연히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도움을 준 책들은 바로 내 과거를 설명해주는 책이었다. 내가 과거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해주는 책들을 읽으며 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과거를 돌아보는 유일한 방식은 회상이었다. 나는 근무 시간에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논과 밭들을 보면서 근무가 끝날 때까지 옛날 생각에 잠겼다. 서 있는 동안은 옛날 생각 말고 할 게 없었다. 군대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누군가 말하더랬다. 나도 입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될까 궁금했는데 막상 직접 경험해보니 생각이 많아진다는 표현은 조금 아쉬운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많아지기보다 생각 말고는 할 게 없다는 표현이 비교적 정확했다.


나 혼자 과거를 떠올릴 때는 추억이랍시고 ‘그땐 그랬지’ 식으로 회상했다. ‘그때는 그렇게 술을 마셨지. 그때는 그렇게 힘들어했지’라며 말이다. 과거 행동에 대한 해석보다는 그저 ‘이런저런 생각과 행동을 했었다’는 회상만 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생각과 행동을 나열하기만 했다. 물론 그런 회상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남들에게 끌려 다니고 남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니 내 과거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뼈아픈 설명들이 쏟아져 내렸다. 더 이상은 행동의 나열이 아니었다. 한 가지 행동을 잡고 그 행동의 원인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무릎을 치면서 책을 읽었다. 짧고 단순하지만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정확한 설명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왜 SNS에 미쳐 살 수 밖에 없었는지, 내가 왜 식습관이 망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방구석에 누워있는데도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책이 모조리 설명해주었다. 심지어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많았는지, 나는 왜 공부를 하기로 선택하고 왜 그렇게 조급하게 꿈을 정하려 애썼는지까지 다 설명해주었다. 단지 설명만 들었는데도 나는 위로를 받았다.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구나. 나도 정말 애쓰고 있었구나.’ 설명들을 모아가다 보니까 이미 한번 이름을 붙인 감정을 다시 느끼거나 생각을 할 때면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과거에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되니까 한 가지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 바꿀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었다. 왜 그런지 알았으니 이제 안 그러면 되지 않은가. 구실을 만들지 않으면 됐다. 내 식습관이 망가진 이유는 내가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매일이 답답하고 불안한 하루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식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나는 음식을 멀리 하는 게 아니라 답답하고 불안한 하루와 정면으로 부딪혀야 했다. 이건 굉장한 깨달음이었다. 증상이 아니라 그 증상이 생기게 된 원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첫 발걸음이었다. ‘이제 자극적인 음식 그만 먹어야지.’가 아니라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 된 원인과 진짜 해결책을 찾아야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증상에만 집중하면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마치 아무리 베어도 다음날 다시 자라나는 잡초처럼 말이다. 다음날 다시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


나는 이때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안하기보다 오히려 희망의 감정을 더 많이 느꼈다. 어떤 일이 나에게 찾아올지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는 23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이었다. 당장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20대 초반의 친구들이 어딘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 과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내 과거를 더 잘 이해한다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나는 과거의 생각과 경험을 글로 써 내려갔다. 곰곰이 생각하며 글을 쓰려고 했지만 나는 20살의 모든 순간순간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단 어떤 특정한 사건들로 그 시기를 해석했다. “이 일은 무조건 넣어야 해. 이 일은 지금의 나를 설명해주지 못해”라고 중얼거리며 글을 써 내려갔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와 같다. 영화는 마치 그 인물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가 겪은 삶의 일부분만을 스크린에 보여줄 뿐이다. 관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이 그 전에는 어떻게 살았으며 그 이후에 어떻게 살지에 대해 짐작하고 이해한다. 내가 만약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내 인생을 보여준다면 겪은 일 모두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 나를 정의하는 사건 일부만 보여주면 된다. 나머지는 관객이 알아서 상상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은 모든 경험을 이야기하는 작업이 아니라 경험을 선별하는 작업이다. 경험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의 나를 정의하는 과거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과거의 나를 적어가다 보니 나는 내 인생에 대한 감사함이 들었다. ‘과거의 내가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하고 가정해보니 결과가 더 좋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최악의 내가 탄생할 뻔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의 모습이 나의 최선의 모습이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길은 없었다. 나답지 않은 길이라고 믿어온 그 길 역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는 나의 경험들이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보다 안 좋은 내가 탄생했을 거라고 믿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지금껏 겪은 고통을 나를 위한 성장의 거름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다시 돌아가 그 고통을 다시 겪을 수 있느냐 물으면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겠지만 그 고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과거를 해석하고 글을 쓰다 보니 인생이 일관성 있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경험한 수많은 일들은 그때 당시에는 전혀 연결할 여지가 없는 독립적인 일들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겪은 일들은 모두 현재와 일관성을 갖춘 하나의 선에 놓여져있는 일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걸 어디에 써먹지?’라고 생각한 일들도 나중에 도움이 되거나 지금의 나를 정의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과연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까 싶은 일들도 언젠가 내 일관성 있는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 될 거라 믿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유부단한 성격이 점점 고쳐졌다.


나는 과거를 스토리텔링 하며 내가 마주한 많은 사건들이 나를 정의하는 일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럴수록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지만 뭐라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제는 일을 하는 이유를 강박적으로 묻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반드시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를 미래에 발견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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