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공부를 포기하고 찾기 시작한 ‘무엇’은 뭐였을까? 거의 4년이 넘도록 찾아 헤맨 것은 ‘천직’이었다.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 회의감이 들지 않는 일. 의미가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처음에는 이걸 찾고 있다는 사실부터 한심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꿈을 좇느라 바쁜데 나는 이제야 꿈을 찾기 바쁘다니. 심지어 꿈을 찾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찾으면 찾을수록 내가 재능이 없고 무능한 바보라는 사실에 낙담했다. 나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나를 더 미워했다.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뭘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때 우연히 찾아온 고마운 글이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 글은 아인슈타인과 관련한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읽었다고 믿고 있지만 내 머리는 글의 내용을 나 스스로 생각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분명 어딘가에서 읽었다.) 그 글의 뉘앙스는 이러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농구는 못하지 않겠느냐.’
웃기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래, 지금 내가 재능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나에게 맞지 않는 일만 해와서 그런 거야.’ 그렇다. 중국의 소설가 조설근도 유학을 공부할 때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낙담하다가 소설 <홍루몽>을 쓰며 자신의 날개를 펼치지 않았는가! 위로가 됐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눈을 반쯤 감고 내가 어떤 분야에서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지 찾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헬렌 켈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시력은 있는데 비전이 없는 사람, 사명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말한 대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었다. 비전이나 사명은 없었다. 항상 비전이나 사명에 굶주렸다.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원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도 있고, 히피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며 스타트업을 창업한 수많은 젊은이들도 있다. 이처럼 듣기만 해도 그럴듯한 비전들을 볼 때마다 나는 꿈에 더 굶주렸다. ‘나는 왜 비전이 없을까. 사명이 없을까. 나도 그 ‘사명’만 찾는다면 그 사명을 향해서 달려갈 자신이 있는데!’ 그 사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한때는 원대한 사명을 포기하려고 했다. 목표를 낮추고 사명을 작게 만들면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었다.
맞다. 사명은 원대할 필요가 없다. 소소하다고 생각되는 사명이어도 좋다. 하지만 아무리 소소한 사명이라도 그 사명이 일상에 녹아들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쉽게 우울해지고 공허함을 느낀다. 일상에 사명이 녹아 있는 사람이 삶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법이다.
나는 작은 사명마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찾을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욕심이 있었다. ‘기왕 태어난 인생 거대한 사명을 좇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온 나날이었다. 도저히 사명을 찾을 수 없으니 점점 ‘천직’이라는 단어에 대해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천직은 과연 정말로 존재할까? 내가 찾고 있는 천직이 만약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금까지는 천직이 있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찾아다녔지만 만약 정말로 천직이라는 개념이 허상일 뿐이라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도대체 천직은 무엇일까?
나이키의 공동 창업자 필 나이트는 “20대 중반의 젊은이들에는 직업에 안주하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천직을 찾으라.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계속 찾도록 노력하라.”고 말했다. 그는 천직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계속 찾아나가라고 조언했다. 천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희망적인 소식이다. 그러나 천직에 대한 단서는 주지 않았다.
천직은 ‘직업’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기업의 어떤 부서가 나에게 꼭 맞는가?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이 어딘가에 존재하는데 마치 맛집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를 고르지 못한 것처럼 아직 그 직업을 찾지 못한 상황일까? 과연 그런 게 존재할까?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인류 초기에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내 천직이 작가라면 그 당시에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아마 불 앞에 앉아서 동네 친구들에게 훌륭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꾼이 아니었을까?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내 천직이 만약 전화교환원이었으면 나는 지금 천직을 찾을 수도 없다. 그 직업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천직이 만약 사전적 정의 그대로 ‘타고난 직업’이라면 타고난 직업이 시대의 변화로 인해 사라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게 천직이라면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다. 내가 만약 그 당사자 중 한 명이라면 나는 평생 있지도 않은 천직을 찾으며 무의미한 인생을 살다가 죽는 걸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느꼈다. 천직은 그 정의 자체가 잘못됐다. 천직은 타고난 직업이 아니다.
어른들은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각자의 가치관이 뚜렷했다. 천직이 무엇인지 찾아다니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천직 자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을 즐기면서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어른이 있는 반면, 일을 즐기고 있다고 말하는 어른도 있었다.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가!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그럼 그들은 일이 아니라 놀이를 하는 것일까? 천직은 놀이인가?
천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천직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가지고 있던 오류를 하나씩 수정할 수 있었다. 첫째, 나는 천직을 가슴 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류였다. 가슴 뛰는 일이 천직이라면 달리기만큼 가슴 뛰는 일이 없는데 그럼 세상 모든 인간의 천직은 달리기 선수란 말인가. 그럼 우사인 볼트가 언제나 1등을 할 텐데? 조금 더 오래 가슴 뛰는 일을 찾는다면 마라톤이 좋겠다. 그럼 나는 뛸 때마다 ‘아니, 천직이라는 게 뭐 이래. 전혀 즐겁지 않아. 가슴만 계속 뛰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 천직이 특정 직업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도 오류였다. 어떤 특정 직업이 나의 천직이라고 믿는다면 다른 일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모두 포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재능있는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직업을 모두 능력있게 소화하는 걸 보면 천직은 특정 직업이 아니다. 보통 천직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놀랍게도 직업이 하나가 아니었다.
반대로 특정 직업이 천직이라고 느낀다면 그 직업을 말미암아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내가 ‘교사’라는 직업이 천직이라고 한다면 꼭 학교 교사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직업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학습한 결과물을 가르쳐줄 수 있다. 만약 어릴 때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꿈이었다면 꼭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작가나 조각가, 디자이너, 그 외에 웹툰 작가 등등 ‘예술가’라 소위 말하는 직업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교사라는 직업을 천직이라고 느낀다면 직업을 보지 말고 왜 교사인지를 떠올려보면 도움이 된다. 만약 ‘내가 배운 것을 남에게 일깨워주어서 타인들이 영감을 받기 때문에’ 교사가 천직이라고 느낀다면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 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주는 수많은 일들이 그 사람이 찾는 ‘무엇’ 될 수 있다.
그러니 어릴 적 꿈이나 살면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 일을 떠올려보아라. 어릴 적 꿈은 어떠한 잡념과 계산적인 생각도 끼지 않는다.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과거로 돌아가라. 당신에게 순수한 행복을 주는 꿈은 사실 당신 안에 있다. 살면서 많은 장애물이 우리 내면의 꿈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나는 개그맨이 꿈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데에서 행복을 느꼈다. 친구들 주위에 있는 일이 행복하고 기뻤다. 즉, 다른 사람을 직접 만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좋다는 말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수많은 직업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갈팡지팡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일도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저 일도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개그맨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타인을 만나 내 영향력을 발휘해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내 어린 시절의 나처럼 여전히 나는 기쁨을 느낄 것이다. 개그맨은 그 당시 아는 인상 깊은 직업일 뿐이다. 포장보다 그 포장 안에 있는 ‘꿈’의 원인이 나에게 더 많은 단서를 준다.
셋째, ‘천직을 찾아야만 내 인생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오류다. 만약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천직을 찾기 전 인생은 버리는 인생일까?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또한 꼭 직업이 아니더라도 인생이 의미가 있다고 느낄 수많은 영역이 있다. 사랑이 있고, 경이로움이 있다.
나는 이미 천직을 찾기도 이전에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그 순간만큼은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구나 싶었다. 그 지루하고 반복적이라는 군대에서 마저 나는 하루하루가 꽤나 흥미롭고 설레었다. 친구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과자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순간은 항상 여유롭고 잔잔했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오늘은 또 어떤 깨달음이 나에게 찾아올까 생각하며 기대를 해보고,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면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 기뻐했다. 분명 나는 천직이 없이도 기쁨을 느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절대 직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인생에 의미를 주는 일이라면 직업 외에도 수많은 일이 있다. 나는 그중에 사랑을 대체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천직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 나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조언을 들어보고 찾아보고 내 경험을 돌아보며 하나의 정의를 내렸다. 천직은 ‘나 자신과 일의 훌륭한 조화’다.
천직을 정의하기 위해 나는 먼저 사명에 대해 떠올렸다. 내가 그토록 찾던 사명에 대해 사고 실험을 던져 보았다. 만약 우주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내 인생의 사명이라면 그 사명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 대해 얼마나 많은 방법이 있는가. 우주에 사람을 보내는 회사로 들어가 문서 정리 업무만 하더라도 나는 사람을 우주에 보내는 사명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문서 정리를 하지 않으면 우주 비행이 자꾸만 지연되지 않겠는가!
만약 이 생각이 옳다면 직업을 찾기보다 사명을 찾는 게 맞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만약 사명이 생기고 그 사명을 달성할 수 있는 아무 직업이나 선택한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사명 좋아, 다 좋다 그래. 근데 도저히 일을 견딜 수 없어. 이 일은 도저히 나랑 맞지 않아!’ 사명만 보고 아무 직업이나 선택한다면 선택지가 너무 광범위하다. 게다가 지금과 같이 우유부단한 상태라면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을 게 뻔했다. 당장 공부를 하더라도 ‘나는 왜 이 공부를 하고 있지? 앞으로 이 공부를 어디에 쓰지도 않을 거 같은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떤 사명을 정해서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과연 이 사명을 달성하는 가장 훌륭한 일이 이 일이 맞을까?’라는 생각이 안 들겠는가? 사명 하나만으로는 천직에 대한 배고픔을 채울 수는 없어 보였다. 또다시 직업이었다.
더 이상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일단은 질문을 내려놓고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나에게 재밌는 깨달음을 준 일이 일어났다. 나는 오전부터 청소 작업에 끌려갔다. 청소는 그야말로 질색이었다. 당장 책을 읽고 싶은데 청소라니! 끔찍했다. 처음 10분 동안은 속으로 불평불만을 쏟아부으며 중얼중얼거렸다. ‘이 좋은 주말에 청소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열심히 먼지를 쓸고 걸레를 빨아 바닥을 열심히 닦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까지도 꼼꼼하게 처리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청소에 진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 싫은 청소를 이제는 누구보다 열심히 임하고 있었다. 나는 그야말로 청소에 ‘몰입’하고 있었다.
몰입은 ‘무엇’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그 무엇이 나의 실력과 맞는지, 어떤 컨디션에서 임하고 있는지 등 ‘어떻게’가 중요하다. 몰입은 생각보다 ‘무엇을’을 따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청소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하기 싫다고 징징댄 청소가 이렇게 재밌다니! 나중에 가서야 책을 통해 ‘행복이 우리가 하는 일보다 그 일에 얼마나 집중해서 참여하는지 달려있다’는 연구 결과를 알게 되었다. 내가 몰입한 그 순간은 청소의 난이도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청소하는 그 순간이 행복했다.
천직이 만약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천직은 어쩌면 ‘무엇’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청소를 싫어하는 나도 청소에 집중하면 어느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청소를 즐기고 있었다. 청소하는 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난이도의 어려움도 없었다. 공부를 끔찍이 여기는 나도 한때는 문제를 풀고 맞추는 쾌감, 뭔가 성장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 짜릿함에 공부를 즐긴 적이 있었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점점 내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깨달아가면서 그 재미는 복리처럼 늘어났다. 난이도에 맞는 문제만 푼다면 금방 몰입할 수 있었다.
‘어쩌면 문제가 일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지 않을까?’ 물음을 던져 보았다. 즉 ‘어떻게’를 잘 모르는 나에 대한 문제다. 물론 일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100가지 일을 눈앞에 펼쳐둔다고 생각했을 때 그중에 나와 더 맞는 일이 있고 더 나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이 있는 건 분명했다. 나와 수준이 맞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분명히 일도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온전히 일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오히려 일보다 나의 문제가 더 크게 느껴졌다. 점점 눈이 뜨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알고 싶은 답은 정말 ‘온전히 나의 문제인가?’였다.
‘일체유심조’ 불교의 용어다. 모든 것이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럼 천직은 정말 온전히 나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 부분은 분명히 찝찝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지금 하는 일을 천직으로 바꿀 수 있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말이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분명 여러 책을 읽으면서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즐겨라’는 조언을 들어왔다. 그것이 참진리였던가? 하지만 분명 어떤 일이 나에게 더 맞는다는 느낌은 분명히 있다. 아인슈타인을 떠올려보라! 그가 만약 물리학을 하지 않고 농구를 했다면 어땠을지 떠올려보라!
만약 내가 떳떳하게 세 달이 넘어가도록 이 일에 몰입했는데 매일 회의감에 빠지고 도저히 내 강점을 살릴 수 없다고 느낀다면 나랑 안 맞는 일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세 달도 어쩌면 짧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도 매일같이 고통스럽고 남들에 비해 실력이 늘지 않고 결과물도 참혹하다면 그 일은 정말 나랑 맞지 않는다고 느껴도 충분할 법하다.
그런데 나에게 더 ‘맞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또 일과 나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마음만으로는 다 되지 않고 일을 해가면서 내가 어디에 더 내 강점을 보일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온전히 일의 문제도 아니고, 온전히 나의 문제도 아니다. 천직을 찾는 이들은 그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나 스스로에 관한 공부와 개선을 거쳐 나가고, 한편으로 그 일보다 더 나에게 맞는 일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내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는지 떠올려보고 내가 왜 그 일을 흥미롭게 생각했는지 떠올려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생각의 재료는 다 어디서 얻는가? 그렇다. 경험과 사색이다. 그러니 일단 시작은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열심히 해라’가 분명 통하는 조언이었다. 뭐라도 해봐야 뭘 알 테니까 말이다. 다시 탐색과 이용 균형이다. 내가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내가 심하게 우유부단하고 항상 이른 결과만 원한 사회초년생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만 궁리하고 있으니 아무 일이나 하지 못했다.
점점 천직에 대한 실마리가 잡혔다. ‘일단 아무 일이나 하면서 나의 사명과 특성을 발견해서 내 사명을 달성하면서도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해야겠구나. 그런데 그것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내 사고방식을 바꾸고 낡은 가치관들을 버려야 하는구나.’
그럼 어떤 사고방식과 낡은 가치관을 버려야 할까? 나는 항상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만 떠올렸다. 그래서 시작을 하지 못했다.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열심히 해보자는 이성적인 생각은 있었지만 가슴 한 켠에는 ‘이 일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거 같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시점에서 미래를 판단한다. 지금 쓸모가 없어 보이면 나중에도 쓸모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다. 내가 항상 해온 질문인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지?’는 모두 그런 질문이다. 나중에 이 공부를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니까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 일은 의미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나중에도 나에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믿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 사고방식은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사고방식만 고치더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끙끙댈 일은 없다. 물론 이 사고방식을 고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본능과 이성을 한 자리에 앉혀 놓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눠야 한다.
과거를 스토리텔링 하며 인생의 일관성에 대해 깨달은 자는 지금 하는 일이 언젠가 반드시 내 인생의 소중한 일부가 된다고 믿는다. 지금 당장은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나중에 반드시 나에게 의미를 주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따라서 지금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도 일단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진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자신이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를 미루어짐작하는 사고방식에 조종당한다는 뜻이다. 인생의 일관성에 대해 곱씹어보고 경험해보면 이 사고방식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 일이나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또 다른 일을 찾기 위함일 수도 있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함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 목적이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나의 처음 독서 목적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목적이 생길 수 있다. 일의 최종 결과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지금 당장은 모른다. 미래에 어떻게 될지 지금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 끝은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모를 일이다.
내가 아무 책이나 읽으며 독서를 시작할 당시에 러시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사실 어떠한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독서를 위한 독서였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계속 도전하고 시도에 시도를 거듭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목적을 발견하게 해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 목적은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단하지 않은 목적 덕분에 새로운 목적을 만났다면 과연 그 사소해 보이는 첫걸음이 새로운 목적을 찾게 된 과정의 일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지금 당면한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지금은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일,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일에서도 배움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랑 맞지 않는 일이라고 느껴도 그 일을 하며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다음에 더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은 지금 일이 나랑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나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계산을 해왔다. 내 미래에 도움이 되겠다 싶은 일만 골라 담았고 지난 몇 년간 그런 일이 도저히 눈에 보이지 않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과 나에게 의미가 있을 거 같은 일만 해왔다. 지금의 초라한 상황을 기준으로 어떤 일이나 사명을 판단하고 평가하려 들면 그 어떤 일도 나와 안 어울릴 터이다. 당연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인간일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무언가라도 해가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아야 했다.
모순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찾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 다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만약 무엇을 찾기 위해 무언가 하기가 어렵다면 사고방식을 점검해보라. 사고방식을 바꾸면 행동이 저절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리라고 기다리다 보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때 문제점은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을 버리고 무언가 해야만 뭘 해야 할지 안다는 깨달음을 새롭게 추가해보라. 행동은 저절로 바뀐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냐하면 무엇을 안 해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직은 무엇인가?’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 있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해당 일에 대한 능력과 노하우를 가질 정도로 능숙해진 상태에서, 나의 사명이나 가치관과 연결되어 즐길 수 있는 일. 그것이 천직이다. 천직은 그렇기 때문에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이 길고 장황한 말을 단어로 줄여보면 ‘나와 일의 훌륭한 조화’가 아닐까. 다음과 같은 정의에 따르면 일보다는 ‘나’ 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그 많은 일에 공통된 ‘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 천직은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직은 나에게 달린 문제다. ‘온전히’ 나에게 달린 문제는 아니지만 분명 나에게 훨씬 많은 비중이 부여된 문제다.
나는 이제 공부를 다시 생각해봤다. 이제는 다시 공부를 해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일단 정해진 전공 강의를 공부해야 하는가? 그냥 남이 하라는 공부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틀에 박힌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정말 알고 싶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명이나 가치관과 연결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전공 공부는 모두 대답이었다. 전공은 질문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질문으로 시작해 그들이 내놓은 대답이었다. 아! 나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만약 질문을 던진다면 전공은 수단이었다. 내가 만약 어떤 하나의 궁금증으로 시작해 질문을 하나 던진다면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전공 학문만 공부해야 하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기 위해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답을 내려야 한다.
만약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분야는 여러 가지가 된다. 헌데 질문을 던지지 않고 한 가지 분야에 대한 남의 대답만 주구장창 공부하면 어떠한 판단력이나 사고력, 통찰은 생기지 않는다.
천직도 마찬가지다! 사명이나 목적은 주제이며 직업은 어떤 사명이나 목적 등 거대한 주제에 대한 수단이다. 나는 지금까지 천직이라 하면 직업만 찾기 바빴다. 하지만 진짜 천직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이들은 직업이 아니라 직업 위에 있는 ‘목적’을 일상에 녹인다. 직업은 그 목적을 일상에 녹인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수단 중 나의 특성과 가장 맞고 사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수단들을 골라야 한다. 만약 목적이나 사명을 발견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수단에 대한 질문만 주구장창 쏟아붓는다면 도저히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직장에 취업해야 하지?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천직은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 직업이 아니다. 직업은 사명 하위에 있는 가지에 불과하다. 수단을 즐길 수 있는 실력과 집중력, 책임감과 유연성, 게다가 자신에 대한 이해를 갖춘 사람이 자신의 특성에 꼭 맞는 일로서 사명을 달성하여 세상이 그의 사명에 반응할 때 그 상황을 그저 ‘천직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 정의대로라면 천직은 절대 시작부터 천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초년생이 천직을 찾으려고 하면 절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언젠가 천직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을 완전히 버리자. 천직으로 시작되는 일은 없다.
무엇을 해야 할지 찾기만 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행복하기 위해서 살면 행복할 수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