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

2021년 5월 12일 (수) / 30일 차

by 곤잘레스 파파

2021년 5월 12일, 수요일 (30일 차) 다행이다!

강정 숙소 → 김부자식당 (갈치조림/구이 ★★★)

에코랜드 (★★★★) → 서귀포 올레시장

→ (밤) 외돌개와 새연교


지금은 밤 11시 40분.

날이 좋은 밤바다를 보고 싶어 가까운 포구로 나왔다.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포구는 법환포구인데

은근 이 해안도로가 좋다.

특히, 오랜만에 야밤에 듣는 라디오는

또 왜 그렇게 감성을 자극하는지.

라디오에서 이적의 “다행이다”가 흘러나온다.

너무 좋은 가사와 멜로디가 심금을 울린다.



조명이 하나도 없는

칠흑 같은 외돌개 밤길을 혼자 걸었다.

약간 겁도 났지만 핸드폰 조명에 의지한 채

깜깜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전망대까지 걸어갔다.


불을 끄니 어두운 형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외돌개였다.

우리 눈은 이런 어두움에 천천히 적응한다.

어두울 때 귀는 눈보다 밝다.

파도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한 숲길.

밤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가득하다.

아내와 같이 이 길을 걸었으면 좋았겠다.

오늘은 벌써 제주살이 한 달째 되는 서른 날.

참 많은 생각이 든다.


한 달간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고 어떠했는가?

나의 휴직 목적은 순전히 육아였는데,

그 순수한 목적을 원 없이 잘 해왔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말도 안 되게 눈부신 날들이었다.

이 답답한 코로나 시국에 제주살이는 신의 한 수였다.


비록 아이들 얼굴은 까맣게 탔지만

마음껏 좋은 공기를 마시며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고,

자녀와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졌으며

갈등이 잦았던 부부관계도 좋아졌다.

아무래도 낯선 곳에서 24시간 육아를 함께해야 하는

상호의존적인 동지라 평소보다

대화도 많아진 덕분이다.


“다행이다”


남을 이해 못 할 것은 없으나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너무 욕심이 많았다.

놓을 건 놓고, 새로 담을 건 담자.

마흔이 넘으면 관계도 불필요하게

복잡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렇게 타인에게 지치고 감정 소비를 하느니

하루라도 좋은 인연들과 더 즐기는 게 낫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더 단순해져야지.

제주에,

며칠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마당에

돌아가는 배편을 취소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미련이 남아야

또 오겠지라는 생각에 참는다.


많은 사진을 남긴 것도

기억하고 싶은 여백을 채우고 싶은 작은 욕심이다.

한 달, 나름 열심히 살았다.

우리 넷 모두.



매일 A4용지 두 장 분량으로

하루하루 감정을 일기장에 담는다.

아무리 피곤하고 술에 취해도

절대 그날 감정은 이틀을 넘기지 않았다.

다시 반추하기에 이미 지나버린 기억은

조각조각 재편집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만들었던 인도 방랑기처럼

가족들의 제주 한달살이 추억 집을 만들어야지.

아이들에게 그래도 2021년 봄날은

부모와 함께하는 좋은 추억이라는

작은 기념품 하나를 간직하고 싶어서.


순전히 내 욕심이지만.

돌아가면 부지런히 정리해봐야겠다.

다시 돌아가면 그래도 조금은 달라진 게 있지 않을까.

당장 아이들부터!


물론, 아이들에게는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들을 잔뜩 심어준 건 아닐까.

어린이집에는 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또 아이들이니까 나름 잘 적응하겠지 뭐.


그나마 얻는 위안 하나는

내 체력이 아직은 그렇게 저질은 아니라는 사실.

어쨌든 모든 게 좋았다!

아내와 치닫는 그 갈등들까지도.



오늘 아침에는 날이 좋아 숲으로 갔다.

제주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뻔히 알면서도

오늘도 꼬빡 속아 넘어가버렸다.

한라산 중턱에 오르니

희뿌연 구름 속으로 들어갔고 날은 무척 추워졌다.

아내는 구름 속 드라이빙을 멋지게 해냈다.


덕분에 오늘의 목적지인

에코랜드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안개 시린 벌판은 시렸으나

숲은 그나마 따뜻했다.


숲을 둘러보기에는

곶자왈처럼 걷는 것도 물론 좋지만

아직 완전히 걷지 못하는 아이들과 함께라면

기차로 돌아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스누피가든이 인위적으로 세련되게 지어진 느낌이라면

에코랜드는 드넓은 숲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망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각 구간마다 숲을 가로지르는 기차가 너무 멋졌고,

아이들도 정말 좋아했다.


5월 중턱에 유채꽃 봄을 느낄 수 있기에

에코랜드가 단연코 최고다!

다만, 코로나 시국에

단체 관광객들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코스라

그게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추위만 아니면 다 훌륭했다!


숲을 가로지르는 열차


안개 서린 벌판은 시리지만, 숲은 따뜻하다!


곳곳이 참 예쁘고 걷기에 좋았다.

숲도 있고, 인위적인 조형물들도 있고,

기차도 타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연세가 있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도

괜찮은 관광지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늦은 오후,

어르신 단체 관광객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우리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남으로 회귀하자,

거짓말처럼 날이 갰다.


서른 날,

하루도 빠짐없이 우린, 참 많이도 다녔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와 사는 건 참 다행이다.

아내와 나는 둘 다 꽤 역마살이 있는 듯.

아이들도 역마살을 닮아가는 것 같다.

성격은 다르지만, 관심사가 일치하는 건 행복이다.

다른 부분은 맞춰가면 되지만,

좋아하는 건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와 참 잘 만났다!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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