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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잘레스 파파 Feb 20. 2022

[3] 삶이 만든 기적 <감자탕>

세계에서 돼지 등뼈가 제일 비싼 나라가 된 이유

광화문 뚝감


서울 서대문에 자주 찾는 맛집이 있다.

"광화문 뚝감"이라고 뚝배기 감자탕 준말을 살린

줄 서서 먹는 감자탕 맛집이다!


몸이 으슬으슬한 추운 겨울날 생각나고,

비 오는 날 소주 한 잔이 당길 때 생각나고,

병원 들렸다 몸이 허해지는 날 생각나고,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생각나는 그런

스테디셀러한 맛집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생각만으로 군침이 돈다 ㅠㅠ



한식사를 자료조사하면서

여러 전문가 분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딱 명확하게 <한식이란 이것이다!>라고

답해주시는 전문가는 한 분도 없었지만

여러 전문가를 만나면서 짚어지는 맥이란 게 생겼다.


"끊임없이 적응하고, 변화하고, 만들어가는 맛"


특히, 식민지와 전쟁으로

전통 유지란 사치가 될 만큼

우리의 고유 전통 산산이 뭉개졌고

먹고사는 것조차 힘든 역사다보니

그 안에서 100년 넘는 노포를 운영하며

명맥을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우리 입맛은

어느 나라보다 변화에 잘 적응하고,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것으로 체화할 줄 아는

나름의 크리에이티브 능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박찬일 셰프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프로그램 취지는 굉장히 좋게 보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울 게 없다고 엄포를 놓으신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ㅠ




막창, 곱창, 버릴 게 없다!


셰프님에게 들었던 인상적인 얘기 중

우리 민족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버리는 게 없는 민족"이란 것.


소나 돼지 등 물자가 풍부한 서양에서는

바비큐나 스테이크에 필요한 핵심 부위 외에

부속물은 버려지거나 값싸게 수출한다.


반면 우리는 머리, 내장, 다리, 뼈까지

몇 번이고 우려먹는다.

돼지고기가 부족했을 때

버려지는 부위로 ‘감자탕’도 개발하고,

곱창으로 구워 먹고, 볶아 먹었다.


워낙 가난했기 때문이었을까???

대도시에 모여들던 빈민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돼지 특수부위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김해 도축장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은

돼지를 손질하다 고기를 조금씩 잘라

선술집이나 포차에 팔아 용돈벌이를 했는데

돼지머리 뒤에서 나온다고 해서 뒷고기라고도 불린다.


값싼 사료가 들어오고,

공장제 축산기술이 발달하면서

돼지 공급이 많아졌다.

덕분에 우리가 즐겨 먹는

삼겹살, 목살 등 주요 부위는

물가상승률 대비 큰 폭으로 오르진 않았는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이 하나 나온다!


★★★★★

삼겹살이 10년 전에 비해 30~40% 정도 올랐다면

바로, 돼지 등뼈는 무려 3배가 올랐다는 사실!!!

감자탕 덕분에

세계에서 제일 돼지 등뼈가 비싼 나라가 된 것이다.


가난해서 먹었던 감자탕이

이제 미식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감자탕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며 맛볼 때

'해장국에 감자가 더 많이 들어가서 감자탕인가?'라는

근거 없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바보 같은 답변에 누군가

돼지 등뼈 부위에서 '감자뼈'를 사용해

감자탕이라고 하는 거야~라고 해명해줬을 때

신세계를 경험한 듯 존경의 화답을 보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그 또한 근거 없는 설이라는 것!


돼지등뼈를 한자로 부르면 감저(甘猪)라고 한다.

즉, 단맛이 나는 돼지고기!

이것을 넣고 끓인 것이 바로 감저탕이고

감저탕이 변해 감자탕이라고 불린 설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저(猪)"는 우리가 아는 돼지 돈(豚)이 아닌

바로 멧돼지를 의미한다.

돼지를 구하기 어려웠을 무렵,

멧돼지로도 탕을 끓여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아무튼, 감자탕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90년대부터다.

감자탕, 뼈다귀 해장국, 뼈다귓국 모두 같은 류다.

더 이상 발라낼 수 없는 돼지 등뼈에 남은 살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에 올랐고,

청계천 인근의 봉제공장 주변으로

감자탕집, 돼지곱창, 돼지족발, 순댓국 등  

돼지 부속물 음식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그렇게 우거지, 시래기, 깻잎 등이 어우러져

들깻가루 잔뜩 넣으면

몸보신에 이만한 음식이 없다.


여기서 궁금한 게

왜 감자탕에는 깍두기만 나올까?


물론, 깍두기만 한 반찬이 없긴 하지만

이것도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가 만든 표준식단제 영향이다.

설렁탕, 곰탕, 육개장 등 탕반을 판매하는

식당에서는 김치(깍두기) 1종류와 나물 1종류,

모두 두 가지만 반찬을 내도록 통제한 것이다.

혼분식 장려운동의 영향으로

설렁탕에 쌀밥 대신 국수를 넣기 시작한 게

요맘때부터라고 하니 먹고살게 부족하다 보니

가난 덕에 참 많은 식문화가 바뀌기도 했다.


감자탕, 뼈다귀해장국, 뼈다귓국...


해장국에도 종류가 많다.

감자탕처럼 돼지 뼈를 넣고 끓인 뼈해장국,

선지를 넣고 끓인 선지 해장국,

콩나물을 넣고 끓인 콩나물해장국 등등.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술을 참 즐겼다.

해장국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에 등장했을 정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1670) 에는 전체 조리서 중

무려 35%가 술 만드는 비법이었다.

"봉제사 접빈객"이 미덕이었던 시대답게

술 마시는 일도, 해장하는 일도

부덕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술 좋아하는 핑계대기 딱 좋은 해명일 듯)




1964년 도쿄 올림픽,

일본에 납품하기 위한 양돈업이 활개를 칠 무렵

일본인들이 먹지 않는 부산물들이

유독 국내에 많이 유입됐다.


감자탕, 순대, 뒷고기 등이 확산되는 시기였다.


경제개발의 최전선에서

주 6일은 기본, 밤낮없이 일하던

1970년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막걸리나 소주를 반주로 곁들인

감자탕 한 그릇은 온종일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래주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재미있는 한식의 시대 구분 중 하나가,

먹고사는 게 생존문제였던

악식의 시대에서

먹는 것이 부와 권력이 됐던

폭식의 시대를 거쳐

먹는 결정권이 개인에게 돌아온

미식의 시대로 왔다!  

                            (박상현 맛 칼럼리스트)


감자탕은

악식의 시대에서 미식의 시대까지

노동자들의 눈물을 안주 삼아

서민들의 터전에 자리 잡았다.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뭐든 다 먹을 수밖에 없는

슬픈 민족사와 괘를 같이 한다.


하지만, 슬픈 민족사는

새로운 맛의 영역에 도전하고,

새로운 미각을 창조해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게 만드는

동력이 됐다!!


그건 어떤 정치권력도, 자본의 힘도 아닌

살기 위한 우리네 삶이 만든 기적이었다.


나만의 한식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다소 추상적이지만)

우리네 한식이란
삶의 기적이 만든 신의 선물
이 아닐까?


그렇게

소소하게 정의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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