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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잘레스 파파 Feb 19. 2022

[2] 슬픈 캐러멜 짜장면

탄압 속에 꽃 피운 대중음식 잔혹사

짜장면을 처음 맛본 아이, 마라도에서


"짜장면 시키신 부우우우~~운"


1997년 개그맨 이창명이

마라도 앞바다에서 짜장면 배달을 하는

유명한 통신사 광고의 시그널 멘트!


그만큼 짜장면은 전국 어디에서나

배달이 가능해야 된다는 대중음식으로

광고에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작년 제주살이에서 들렀던 마라도에는

해물과 톳 베이스로 조리된 짜장면 집이

수십 개에 이를 정도로 호황이었다.



전국에 중국집 개수는 몇 개나 될까?

한 책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전국 24,000여 개의 중국음식점에서

하루 평균 600만 그릇이 팔리고 있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국민 8명 중 1명은 매일 짜장면을 먹는다는 얘기다.

(출처 : 사물의 민낯, 2012, 김지룡, 갈릴레오 SNC)


뽐뿌라는 커뮤니티에서

어떤 네티즌이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교회, 편의점, 중국집, 치킨집 개수를

비교했는데 중국집이 약 25,000여 개로

얼핏 비슷한 숫자가 나오는 걸로 보니

10년 전에는 대략 그 정도

중국음식점이 있었던 걸로 파악된다.

(출처 : 우리나라 교회, 편의점, 중국집, 치킨집 개수 비교 - 뽐뿌:자유게시판 (ppomppu.co.kr) )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


<철가방>과 <군만두 서비스>로

대변되는 초창기 배달음식의 1번지, 중국집!


80~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청춘이라면,

한 번쯤 졸업장과 꽃다발을 안고

기분 좋게 가족들과 외식하러 갔던 곳.

대학 캠퍼스 앞 당구장에서

동기들과 한 게임 치다가

출출해지면 "짱깨 한 젓가락, 콜?" 하면서

후루룩 들이키고 요구르트 서비스를 쪽 따마셨던 기억.


GOD <어머님께>에서 소환된

우리네 어머님들은 아이들의 성화에

비상금으로 짜장면 한 그릇을 사주면서도

못내 입에 대지 않았다는

슬픈 구절이 절절이 흐른다.


그렇게 짜장면은 소시민의 삶과 추억이 담긴

가히 우리 한식이라 부를 만하다.



짜장면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중국에서 아무리 중화요릿집을 찾아도

짜장면을 맛보기란 쉽지 않다.


중국 북부의 '작장면'이 짜장면의 원형이라는데

중국식 된장을 기름에 볶아 국수 위에 얹어 먹는 음식이다.

중국식 자장면은 콩으로 된장을 볶은 다음

여기에 숙주나물, 오이, 무, 배추 등을 넣어서 만드는데

우리 짜장면과 달리 매우 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1948년 탄생했다!

산둥 출신의 화교 왕송산은 서울 용산에서

'영화 장유'라는 회사를 차리고 춘장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사자표 춘장은 기존의 춘장과 다른 게

바로 캐러멜을 섞은 것이다.


그러면서 춘장은 검은색을 띠고 달콤한 맛을 낸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단짠 짜장면의 완성이다!


중국식 자장면과 우리 짜장면의 비결 '사자표 춘장'


비록 우리 입맛에 맞춘 춘장으로 짜장면을 만들었더라도

우리 입맛에 적응하는 기간도 필요하고

이렇게 대중화시키기에는 쉽지 않았을텐데..

놀랍게도 박정희 군부가 짜장면 대중화의 장본인이었다.


오늘날 살아남은 많은 한식들은

권력이 정한 금기를 깨고

틈새시장을 만들어 대중화에 성공했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얻고자

현금을 많이 보유한 화교들을 겨냥해

화폐개혁을 실시한다.

아울러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화교들의 청요릿집들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집이 됐고,

농촌에서 채소를 재배하던 화교들도

도시로 올라와 중국집을 열었다.


미국의 구호물자인 밀가루가 대량으로 들어오자

부족한 쌀을 대신한 혼분식 장려 정책이

정부 주도하에 강력하게 시행되면서

중국집은 때아닌 호황을 맞는다.


1948년 332개였던 중국음식점은

1964년 2307개로 크게 늘었다.

1960년대 이후 중국집에서는

우동과 짜장면, 짬뽕이 가장 대중적인 메뉴로

자리를 잡았다.      


정부는 물가 안정 정책의 일환으로 짜장면 가격을 통제했다.

중국음식점 주인들은 원가를 낮추기 위해

짜장면에 들어가는 돼지고기 양을 줄이고

감자와 양파를 넣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양념의 주가 감자와 양파인 이유가

여기에서 유래한다.


짜장면 가격은 1971년 석유 파동으로 처음 올랐다.      




임오군란과 차이나타운


짜장면의 원조가 한국에 들어온 계기는

임오군란이었다!


쌀에 모래를 섞어 봉급을 받았을 정도로

홀대받았던 구식 군대의 반란이

청나라 내정 간섭을 부른 것이다.


조선에 들어온 중국 노동자들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던 음식이 바로

산둥에서 유래한 짜지앙미엔이다.


밀가루로 만든 면에다가 춘장을 비벼

간단하게 먹을 수 있고, 값도 쌌다.


화교들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고

중국 본토가 내전에 휩싸이는 이중고를 겪으며

결국 요릿집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산둥요리의 대중화는

이러한 슬픈 화교의 역사를 안고 탄생한 것이다.


거기에 박정희 정권의 화교 탄압은

짜장면을 필두로 한 소규모 중국음식점의

대중화를 불러왔고,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으로

짜장면 가격이 통제되면서

서민음식으로 보편화된 것이다.


짜장면의 역사는 슬프다!

슬픈 서민들의 삶과 닮았다.

길거리 노동자의 음식에서

탄압받았던 이들의 밥벌이로

주도면밀한 정치 권력 속에서

그렇게 짜장면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이렇게 보편적으로

우리 삶 속에 오래

살아남아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몹시 허기진 날,

그렇게 일부러 시켜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


오늘 점심도 짜장면 한 그릇 시켜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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