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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돈미새의 고백

That's my word, that's my world.

by 고은집

<언니가 씀>

돈돈 거리는 사람은 별로다. 돈에만 미쳐 있어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사람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뭐든지 돈, 돈, 거리는 사람은 어딘가 품위 없어 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다. 그냥, 불편했다. 그 돈 얘기란게. 어쩌다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돈 벌 궁리할 자리가 생겼다 치면 손사래를 치며 그곳을 벗어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은연중에 돈을 세속적으로 여겨 탐내고 욕망하면 안 되는 물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학시절 친구들이 앞다투어 더 높은 연봉을 약속하는 대기업에 지원할 때도 나는 태평했다.

'나는 돈만 좇지 않겠어.'


돈을 떠나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직장, 평생 행복하게 임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는 심산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겁쟁이의 자기 위안이었다. 돈을 왜 떠나나? 돈 벌려고 다니는 게 직장인데. 당시 나는 메타인지가 지독히도 떨어진 상태였던 것 같다. 자신을 모른다, 모른다, 아무리 모른대도 정도가 있지! 돈을 좋아하다 못해 절절히 짝사랑하는 주제에, 돈을 본체만체하려 애를 쓰다니. 돈을 지독히 사랑하는데 돈에게는 결코 선택받지 못하는 처지. 그때 나는 한 마리의 여우였다. 앙큼한 불여시 같은 게 아니고, 짝사랑의 비애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써 상대를 신포도 취급하는 실연자 같았달까.


그렇게 되는 대로 살다가, 몇 년 전 영화 <산전수전> (1996)을 만났다. <비밀의 화원>이라는 일본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귀여운 한국 영화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돈'을 아낌없이 사랑해 온 '아현'이다. 아현의 직업은 은행원이다. 눈치챘는가? 그녀는 오로지 돈이 좋아 은행원이 되었다. 여느 날처럼 따분하게 업무를 하던 중, 아현이 근무하는 은행에 강도가 들이닥치며 사건이 시작된다. 아현은 5억 원과 함께 납치되었다가, 기지를 발휘해 탈출한다. 일상으로 돌아온 아현은, 강도들이 모종의 사건으로 5억 원을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현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잃어버린 5억 원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담아낸 게 바로 영화 <산전수전>이다. 플롯은 상당히 간단하고 유치한데 보다 보면 빠져드는 작품이다. 90년대 특유의 빈티지한 감성은 덤.


'아현'은 새침한 성격 탓에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마음 맞는 친구가 없는 외로움은 돈이 채워주었다. 그녀는 연애에 도통 관심 없고, 어떠한 사회적 관념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오로지 돈에만 구속당한다. 돈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아현, 그녀 삶의 목표는 돈이다. 하지만 산 넘고 물 건너 5억 원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아현은 점점 변화한다. 돈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지만, 아현에게 돈보다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난다. 돈이 아닌 다른 가치로 삶을 담뿍 채우기 시작한 아현의 일상은 활력이 넘치며, 얼굴에는 생기가 돈다.


'돈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야!'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이다. 돈을 아끼고 건강하게 욕망하는 아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돈이라는 물질을 추구하는 행위도 꽤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렇다. 이 영화를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솔직하게 인정했다. 나 역시 돈을 끔찍이도 사랑하는구나. 아니, 내가 사랑하는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돈으로 할 수 있는 행위다. 돈이 있어야 가족들에게 맛있고 좋은 식사 한 끼를 대접할 수 있고, 진득한 아로마를 풍기는 레드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돈이 있어야 지독히도 우울한 어느 날, 버터가 가득 들어간 크루아상을 우물거리며 다시 살아갈 위안을 얻을 수 있고, 마스카포네 크림이 올라간 에스프레소를 홀짝대며 현실을 잊은 채 카페인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 나만의 취향과 문화를 향유하는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안전하고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돈은 존재해야 한다. 수단으로써.


<산전수전>의 '아현'은 영화 속에서 돈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찾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아름다움을 알려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오래된 영화라 배우의 연기나 영상미는 어딘가 엉성하고, 어색하다. 플롯도 다소 유치하고 뻔하다. 그렇지만 전개 방식과 캐릭터가 참신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무릎 팍팍 치며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나 개인에게는 내면에 있는 욕망을 솔직하게 대면하도록 만들어주었기에 더욱 마음이 가는 영화였다.


<산전수전>덕분에 돈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나니 관심사가 달라졌다. 이제 나는 누굴 만나든 돈 얘기를 꺼내곤 한다. 사랑에 푹 빠진 사람답지 않나. 대화의 주제와 깊이는 자리와 사람을 가려 하지만 '돈'이라는 대주제는 벗어나지 않는다. 가볍게는 예적금이나, 지금 당장 체리피커가 되어 챙길 수 있는 증권사/금융사/카드사 혜택, 국내/해외 주식 시장 동향, 부동산 이야기까지. 자나 깨나 돈 생각을 하며, 돈에 대한 관심과 정보를 나눈다.


감사하게도 직장 선배들은 모두 투자에 관해 관심이 많아, 듣고 얘기할 준비가 된 분들이다. 덕분에 회사에서 어색한 대화 시간이 주어져도 스몰톡 주제로 '돈' 얘기를 꺼내 유대를 쌓곤 한다. 그 과정에서 인생 선배들의 재테크 방법에서 영감과 교훈을 얻을 때가 많다. 또래 남자 동료나 친구들과는 훨씬 대화가 수월하다. 2030남성이라면, 아무리 말수가 적고 숫기 없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투자를 하고 있다. 타인의 투자법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되 귀담아들으면 실보단 득이 많다. 투자라면 오로지 주식만을 떠올렸던 나에게 채권, 유가, 천가(천연가스), vix 지수 등 다양한 투자처의 존재를 알려주기도 했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배우고, 때로는 나의 투자방식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재테크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는다.


2030여성들에게서도 많이 배운다. 돈 얘기를 꺼낼 때 여성들의 반응은 양극단에 있다. 공격적으로 재테크에 몰입하여 일찍이 자산을 불린 친구도 있고, 투자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있어 예적금만 고집하는 친구도 있다. 재테크 스타일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존중하며,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테크에 몰입하며 자산을 축적하는 친구들에게 감탄할 때가 많다. 이렇게 관심사가 맞는 친구들과는 장기적으로 좋은 네트워킹을 할 수 있다 믿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정보를 나누곤 한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돈을 좋아한다 해도 늘 돈 얘기만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이 투자와 관련된 점은 사실이다.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더라, 지금 이런 주식 종목이 뜬다더라, 미국 대통령이랑 일론 머스크가 싸웠다더라, 테슬라의 미래는 이렇게 될 것 같다는 등, 그야말로 온통 돈 얘기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돈미새'라 생각할 정도로 세속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돈 돈 거리는 우리를, 예전의 나처럼 속물이라 손가락질하며 피해 갈지 모른다.


괜찮다. 돈은 나에게 목적이 아닌 윤택한 삶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뒤에서 흉을 본다고 한들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과거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린고비처럼 절약하는 현재가 자랑스럽다. 그렇게 아껴서 나는 집을 샀다. 억척스러웠던 내 모습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시절은 다행히 떠나갔다. 이제 나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맛있는 스페셜티 커피를 마시면서 돈, 돈 거리는 친구와 어떻게 하면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 고민한다. 또 다른 친구와는 근사한 샐러드 카페에서 만나, 신선한 포케를 먹으면서 어떤 사업 아이템이 좋을지, 어떤 사이드 프로젝트에 도전해볼지 고민한다. 그들과 대화하고, 인사이트를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단단해짐을 느낀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돈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있으면, 언젠가 나역시 느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어느새 일상에 찾아와있다는 것을. 영화 <산전수전> 아현의 삶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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