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언니가 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렇게 말하는 여자 아이였다.
그때마다,
라며 깔깔거리고 웃어넘기는 조롱을 들었다. 상투적인 농담이지만, 누군가의 신념을 가볍게 무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믿지 않는다는 표정, 너의 그 알량한 결심은 얼마 안가 손쉽게 바뀔 거라는 확신. 아직 철이 덜 들어 '결혼하지 않겠다 떼쓰는' 사람인양 나를 단정 짓고, 언젠가 “제일 먼저 시집 가는” 순간이 오면 지난 과거를 반성할 것이라 믿는 듯한 시선들.
갈 생각 없다니까 뭘 제일 먼저 가나? 지금은 30대가 되어 또래들이 많이 결혼한 덕에 저런 말을 듣는 일은 줄었다. 대신, '나이 들면 생각 바뀔걸. 두고 보자'라는 말로 레퍼토리가 조금 바뀌었다. 이 말은 더 이상하다. 내 인생인데 두고 보기는 뭘 두고 보나? 이미 그다지 어리지 않은 나이인데 얼마나 더 나이 들어야 내 말을 믿어주려나. 비혼주의 증명하기 참 빡빡하다. 이대로 계속 지내다간 한평생 비혼이라는 선언을 입에 달고 살며, 죽을 때까지 신념과 입장을 표명해야 할 것 같았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여전하다.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며, 내 삶의 형태를 그들에게 납득시킬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요즘은 어딜 가든, 비혼주의자라고 선언하거나 떠들고 다니진 않는다. 그저 누가 이제 너도 나이가 찼으니 결혼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는 둥, 이제 결혼이 급하겠다는 둥 얘기하면 이렇게 우는 소리한다.
"저 결혼 못할 것 같아요. 집 사서 돈이 없어요."
그러면 배부른 소리라고, 집 있는 여자를 남자들이 더 좋아하지 않겠냐는 답변이 돌아오는데, 어쩐지 수월하게 다른 대화 주제로 넘어갈 수 있다. 한국 30대 여성이 결혼을 포기하고 전 재산을 털어 아파트를 구매한 결정은, 꽤 대담한 선택으로 보이나 보다. 웬만한 결심으로는 선뜻 선택할 수 없는 길이라 여기는지도. 어쨌든 강경하게 '나 비혼이야'외치는 것보다 '나 집 때문에 시집 못 가요'가 더 효과적이다.
이처럼 자가마련은 결혼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대한 증표가 되어주었다. 그래서일까? 이 글에 당당히 '비혼여자가 집 사고 후회한 이유'라 제목 붙였지만, 집을 사고 후회한 적은 '거의' 없다. 몇 억짜리 빚을 내 스스로 엄청난 족쇄를 발에 채운 격 이래도 그랬다. 하지만, 누군가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집을 산다고 했을 때, 후회할 확률이 아예 없다고는 못할 것 같다. 개인의 가치관, 재정 상황, 그리고 미래 변화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삶은 예측 불가능하고, 사람 마음은 더더욱 그렇다. 또 한국은 부동산 정책이나 시장이 급변하고, 미혼에게 사회적 기대가 강한 환경이니 충분히 흔들릴 수 있다.
나 역시 집을 사고 후회했던 적이 몇 번 있다. 어떤 일이든, 뒤늦게 후회하는 행위를 정말 싫어하는 편이다. 이것저것 재고 따져가며 다양한 변수를 고려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포인트들을 철저히 대비하였는데도 어느 순간에는 후회한 적이 있다. 내가 느꼈던 후회를 아래에 써내려 보았다.
아파트를 구매하는 데 거의 재산 대부분을 사용했기에, 경제적 압박에 숨이 막힌 적이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일이다. 직장에서 과도한 업무량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때였다. 당시 살이 5kg가 빠져 보는 사람마다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때 몰려드는 일도 싫었지만, 급격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집이 생겼으니 절대 퇴사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스로 자승자박했구나! 조금만 더 늦게 집을 살 걸…이라며, 후회하는 나 자신의 모습. 정말 멋없었다.
사실, 이번에 아파트를 사면서 소위 '영끌'을 하지 않았다. 여윳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퇴사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백 여 만원의 주택담보대출금 상환액은 큰 부담이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절망적이었다. 덜컥 집을 사버린 덕분에 직장에서 결코 도망치지 못한 채, 모든 풍파를 정면으로 맞아야만 했다.
집이 생긴 기쁨은 잠시였고, 피땀 흘려 번 돈의 30퍼센트를 대출 이자로 내야 하는 신세. 고정비에 발이 묶였다. 빚을 갚기 위해 일하고, 참아야 하는 삶. 그렇지만 시간은 흘렀고, 고난은 끝이 났다. 그때 정말 힘들었지, 라며 멀찍이 떨어져 남일처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후 깨달았다. 집이 있든 없든, 어차피 나는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다. 주택담보대출금 상환이든 뭐든, 어떠한 핑계로라도 회사에 꾸역꾸역 붙어있어야 한다. 커리어는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나 자신도 지키고, 대출금도 갚고. 대출금이라는 존재 덕에 나약한 정신을 재무장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의 맷집이 조금 더 커졌다고 할까? 물론 아직도 강인한 멘탈을 가지진 않았지만, 회사에서 버티기 위한 마음을 가다듬는 데는 대출금의 존재가 꽤 도움이 된다.
이처럼, 비혼 1인 가구의 경우, 거액을 대출해 집을 샀을 때 큰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질병 등 예상치 못한 경제적 어려움이 닥칠 때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만약 집값이 떨어지면, 자산 가치 하락에 대한 불안감과 후회가 생길 수도 있겠다. 특히 30대라면 앞으로 의료비, 노후 준비, 또는 예기치 못한 실직 등 변수가 생길 텐데, 현금이 없으면 대처가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집은 있어야 한다. 내 명의 아파트는 경제적 독립을 이뤘다는 상징이다. 한 인간으로 자립해냈다는 증명이랄까. 대출금은 직장생활에서 긴장을 놓지 않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도 한다. 매달 상환액이 상당하니, 여유있게 빚을 갚기 위하여 연봉을 높이고 싶고, 이어서 업무에서도 좋은 성과를 낼 전략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처럼 빚은 마냥 나쁜 게 아니라 직장 생활에 건강한 활력이 될 수 있다. 또, 심적으로도 빚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월 대출 상환액은, 전세 대출금 이자나, 월세처럼 버리는 주거비가 아니라, 자신과 미래 자산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물론 '영끌' 대출은 확실히 위험한 것 같다. 올해 내가 겪은 일만 해도 그렇다. 그런데, 요즘은 어차피 영혼을 끌어 대출받을 수도 없다. 언론에서는 손쉽게 영끌족을 질타하지만, 여러 대출규제를 통해 이제는 소위 ‘영끌족‘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금융권에서 감당할 만큼의 금액만 빌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소득과 분수에 맞는 돈을 대출하였고, 매달 큰 스트레스 없이 빚을 갚고 있다. 빚이 생기면 마냥 공포스러울 줄 알았는데, 내가 차곡차곡 갚아나갈 수 있는 정도의 상환액이라 별로 부담이 없다. 고액 대출금이 있지만, 아마 10년 뒤에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사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그리고 할 수만 있었다면 10년 전에 집을 샀어도 좋았을 것 같다.
나는 오래 알고 지냈던 동네에 집을 샀다. 직장과의 거리, 서울 중심과의 접근성을 따졌다. 자차가 없어 대중교통이 편리한 곳을 구매했는데, 현재까지는 아주 만족한다. 이렇게 충분한 고민을 하고 위치를 결정했음에도, “내가 너무 일찍 삶을 고정시켜 버린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적 있었다. 갑작스레 근무지가 바뀌거나, 다른 동네로 가고 싶은 욕구가 커질 수도 있지 않은가.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또, 싱글 라이프를 즐기다 보니 여행이나 취미에 돈을 쓰고 싶어질 수도 있는데, 모든 자산이 부동산에 묶여 있으면 아쉬울 수 있다. 흔히 부동산 투자를 '돈 깔고 앉기'라 표현한다. 나 또한 여행을 좋아하며 한때는 디지털 노마드를 꿈꿨던 자유로운 영혼으로, 아파트 한 채에 전재산을 깔고 앉아있기 껄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런데, 부동산 공부를 하고, 유주택자가 되고 나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 환율 저렴한 시기에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다. 파트타임으로 일해 번 돈을 아득바득 모아 기회가 될 때마다 다녀온 것 같다. 솔직히 30대가 되니 급격한 체력 저하가 체감되고, 남들이 좋다는 것을 봐도 크게 감흥이 없다(슬픈 얘기다). 또, 워낙 환율과 유류비가 저렴한 시기에 여행을 다녔기에, 현시점 관광지 물가를 보면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항공권 가격은 어떠한가. 성수기 아니고 비수기에도 백 여 만원을 내야 원하는 곳에 여행을 갈 수 있는데, 소문난 구두쇠로서 용납이 안 된다. 짧게 해외여행을 다녀오고자 몇 백만 원을 써버리다니…'라떼는 말이야' 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여행 다닐 당시만 해도 유럽 왕복 항공권 특가가 40만 원이었다!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자산 증식과 주거 환경 개선에 더 관심이 간다. 재테크가 더 즐겁고 보람 차다. 부동산과 투자가 나의 새로운 취미가 된 것 같다.
주거 자립 이후, 인간관계도 바뀌고 있다. 벌써 친구들은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육아를 시작했다. 친구들의 관심사는 육아와 결혼 생활, 나의 관심사는 재테크와 입신양명. 서로 가는 길이 다르고, 시간이라는 재화는 유한하기에 어쩔 수 없이 관계가 소원해짐을 느낀다. 30대가 되니 생활이 어느 정도 고정되기 시작해 만나는 사람도 한정적이다. 확실히 심심함을 느끼는 하루하루가 많아지는 것을 보면, 앞으로 나는 부족한 커뮤니티에 갈증을 느낄 수 있을 듯싶다. 아파트가 물리적 안정감을 주긴 하지만, 정서적인 허전함을 채워주지 못하니 충분히 후회할 수 있는 포인트다. 그렇다고 해서, '외로움'이 비혼으로 집을 구매한 내 결정에 대한 후회가 되진 않는다고 자신한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 사회는 30대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적이다. 전통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서일까. "왜 결혼 생각이 없냐", "혼자 살면 힘들지 않겠냐"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라고 찜찜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결혼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확신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앞으로도 나는 후회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한 나의 선택을.
후회는 어떤 길을 선택하든 찾아올 수 있다. 결혼을 하더라도 후회할 점이 생길 수 있고, 결혼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결론은 어떤 선택을 했든 그 선택에 책임지고, 삶을 제대로 개척해 나가는 태도다.
반대로, 절대 후회 안 할 수도 있다. 안정적인 직장과 소득이 있고, 싱글 생활을 진심으로 즐기는 타입이라면 말이다. 나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는, 결혼하지 않고 집을 구매한 선택이 자유와 자립을 주는 최고의 결정일 수 있다. 또, 장기적으로는 부동산 자산 가치가 오를 가능성도 있다. 다 떠나서 '집 있는 삶'은 언제나 새롭고 짜릿하다. 내 집에서 잠들고 깨어나는 경험은, 결혼과 별개로 강력한 만족과 안정감을 준다.
내게 후회가 있다면 경제적/삶의 유연성 부족과 인간관계의 변화에서 올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이룩한 편안한 삶에서 오는 안정감, 그리고 꾸준히 축적한 자산에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의 경우 후자가 압도적으로 힘이 세다. '나는 주체적으로 내 삶을 설계하고, 구축했다'는 자부심이야 말로, 결혼 대신 비혼의 삶을 선택한 확고한 근거가 되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