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와 소확행, 근데 이제 건축을 곁들인..

건축가의 공간일기

by KJH

요즘 정말 잘 보고 있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흑백요리사'에서 백종원과 함께 심사를 했던 셰프 안성재의 유튜브다. '재밌게' 보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고 '잘' 보고 있다고 한 이유는,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채널이 아니라, 보면서 '이게 업계 탑의 마인드구나'라는 생각에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기도 한 이유에서다. 유투브에서 이전 모수에서 직원들을 크게 혼내는 소리가 들렸다는 소문에 대해 ’고객들이 자신의 욕을 안들었으면 다행이다.‘ 라는 순수한 인정(?)의 말로 시작한 그의 논리와 가치관을 듣다보면, 저런 마음가짐으로 요리를 대하고 있는 셰프가 있다면 모수 직원들은 존경의 눈으로 그의 곁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반년 전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는 애매하게 화요일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퇴근 후 '하나만 보고 자야지' 하면서 보기 시작했지만, 결국 공개된 에피소드를 끝까지 다 보고야 말았다.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잠들었고, 몇 주째 수요일 아침이 힘들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흑백요리사'의 가장 큰 인기 비결은 두 심사위원이 가진 심사 기준의 차이에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대중을 위한 요리의 1인자인 백종원과,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요리의 1인자인 안성재 셰프. 두 사람 모두 출연자가 제출한 음식의 맛에 대한 의견은 비슷하지만, 요리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티격태격하곤 한다.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어서, '나는 누구의 심사평에 더 공감하는가'를 고민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재료의 형태와 조리법, 맛을 최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 등을 집요하게 물어보는 안성재 셰프를 보고 있자면 학부 시절 교수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떤 위치에, 어떤 형태로, 어떤 재료로, 어떤 기능을 하는 건물을 누구를 위해, 왜 지어야 하는지, 그렇게 했을 때 무엇이 얼마나 좋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던 건축학과의 수업 방식과 닮아 있다.


그러고 보면 건축과 파인다이닝은 꽤 닮아 있는 것 같다. 아마 건축뿐만 아니라 디자인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혹은 종사했던) 사람들은, 안성재 셰프의 집요한 질문들을 들으며 학부 시절 교수님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건축과 파인다이닝의 공통점을 생각하다가, 문득 이 책을 요리책에 비유해 보았다. 내게는 안성재 셰프가 쓴 '대중을 위한 (백종원의) 요리비책'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작가의 이력과 책 제목을 봤을 때, 건축학과 교수가 좋아하는 공간들은 어떤 곳일까 하는 기대가 컸다. 합정 앤트러사이트를 소개했을 때는 '그렇지, 거기는 아무리 유명해도 추천할 만하지'라며 공감하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에서 소개되는 장소들이 이미 가봤거나, 힙한 공간으로 너무 유명한 곳들이라는 점(나의 기준), 특정 지역에 몰려 있거나 일반인이 갈 수 없는 장소(세계적 건축가인 리차드 로저스의 집처럼)라는 점에서 조금 실망감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몰랐던 좋은 공간을 작가를 통해 새롭게 발견하고 싶은 기대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마치 안성재 셰프의 '모수'에 나오는 요리들의 레시피가 적힌 책을 기대했던 것 같다.


물론 책에는 중간중간 좋은 문장들이 있었지만, 건축적인 문장이라기보다는 수필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독자를 웃기려는 듯한 부분들이 많아서, 마치 내 일기를 읽는 것 같이 괜히 오글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즈음에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는 일상 공간의 수준을 높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라는 에필로그 글을 읽고 책을 덮었다.


'일상 공간의 수준을 높이자' 라는 문장은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나의 생활 반경을 돌아보게 되었다. 주말에 책을 읽거나 무언가 끄적이고 싶을 때면 혼자 카페에 가곤 하는데, 근 몇 년 동안 '스세권'이라는 이유로 스타벅스만 가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스타벅스가 나쁜 공간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스타벅스만 가는 것은 일상 공간의 수준을 높이는 행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양해야 하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엄청 멋진 공간이 아니더라도, 심지어 스타벅스보다 부족하더라도, 내 활동 반경 안에서 내 취향에 맞는 새로운 카페와 공간들을 꾸준히 탐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 좋았는지를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시각적으로 정리해 봐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가끔 주변인들이 내가 다녀온 도시로 여행을 갈 때마다 '건축적으로 멋진 곳 추천해 줄 수 있어?'라고 묻던 날들이 떠올랐다. 왠지 유명하지 않지만 멋진 곳을 추천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있었달까?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부담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건축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공간이 아니더라도, 소박하지만 확실한 매력이 있는 공간을 추천해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상 공간의 소확행을 일깨워 준 책'이라 말하고 싶다.




인간에게 계절감이 왜 필요한가?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낀다면, 기억에 새겨둘 만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잘게 쪼개서 일정을 끼워 맞추는 데는 능숙하지만, 시간을 길게 보고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오뚝한 일정을 세우는 데는 서툴다. … 계절감을 느끼는 일은 선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점을 찍어 마음에 저장하는 일이다.


그런데 감각기관은 멀티태스킹에 적합하지 않다.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경우, 청각과 미각이 2개의 자극을 동시에 감지하지 못한다. 마침 카페에서 좋은 음악이 나와서 청각에 신경이 쏠리면, 커피 맛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키스할 때 두 눈을 부릅뜨고 상대방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의 눈이 자연스레 감기는 이유는 촉각이라는 하나의 감각에 집중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내가 물을 주고 내가 잎사귀를 닦아주는데, 위로의 혜택을 받는 것은 오히려 돌보는 쪽이다.


일상 공간의 수준을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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