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로 영화보기/ 지알로 영화(1) 오페라
*영화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1. 지알로(Giallo Film)에 대해
지알로(Giallo)는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이다. 지알로는 원래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 성격을 띤 이탈리아의 값싼 대중소설을 지칭하던 말이었는데 비슷한 영화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임이 확대되었고 영어권에 알려지게 되면서 주로 60~80년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스릴러, 범죄, 공포영화 중 특정한 스타일을 지닌 작품들의 장르를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탈리아어로 노란색이라는 뜻을 지닌 이 단어가 장르명이 된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판매되던 대중소설의 커버가 노란색이었기 때문이다.
지알로 장르 영화는 칼 등의 무기로 사람을 썰고 자르는 슬래셔(Slasher) 장르 영화나 피, 내장 등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잔인한 씬이 많은 고어(Gore) 장르 영화와 외형적으로 비슷하다. 대신 자극적인 이미지를 예술성 있게 보여주기 위해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보다 조명, 미술, 소품 등을 활용한 미장센과 영화 전반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악, 음향 효과에 더 공을 들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 The Girl Who Knew Too Much>(1963)라는 영화로 지알로 장르에 포문을 연 마리오 바바(Mario Bava)를 필두로 아들인 렘바르토 바바(Lamberto Bava), 루시오 폴치(Lucio Fulci), 미쉘 소아비(Michele Soavi) 그리고 오늘 다룰 영화인 <오페라Terror At The Opera>(1987)를 연출한 다리오 아르젠토(Dario Argento)가 지알로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2. 영화 <오페라>의 시놉시스
영화 <오페라>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오페라 <멕베스 Macbeth>의 주연을 맡은 유명 여배우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이에 여배우의 대역이었던 ‘베티’가 급한 대로 무대에 오르는데 평소 꾸준한 연습으로 준비되어있던 베티는 갑작스러운 공연임에도 성공적으로 해내고 신예 오페라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을 마음껏 누리기도 전에 베티는 한 정신이상자 살인마의 표적이 되고 만다. 이 살인마는 베티를 직접 죽이지 않고 베티와 함께 있는 주변 인물을 죽인다. 그러면서 베티를 결박한 채로 눈 밑에 날카로운 바늘들을 붙여 눈을 감으면 바늘이 눈꺼풀을 찌르게 만들어 자신이 하는 살인행위를 똑똑히 지켜보게 했다. 광적인 살인행위가 끝나면 살인마는 베티를 풀어주고 도주한다. 충격을 받은 베티는 이 상황을 오페라 연출가인 ‘마르코’와 자신의 공연을 보러왔던 경찰인 ‘앨런’ 경위에게 알린다. 그들의 보호에도 살인마의 행위는 연쇄적으로 벌어지고 베티의 공포심은 극에 달한다. 베티를 도와주는 마르코는 공포영화를 연출했던 자신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살인마를 잡을 계획을 세운다. 살인마는 전에 극장에 몰래 들어와서 베티의 흔적을 쫓던 중 오페라에 소품으로 쓰일 까마귀를 몇 마리 죽였었다. 마르코는 까마귀가 지능이 높고 복수를 할 줄 안다는 점을 이용해 베티의 공연은 놓치지 않고 보는 살인마를 공연 중에 까마귀 떼를 풀어 잡기로 한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통하고 살인마의 정체가 앨런 경위로 드러난다. 그는 마찬가지로 오페라 가수였던 베티의 엄마에게 집착했었다. 베티의 엄마가 죽은 후 그 삐뚤어진 애정이 베티를 향한 것이다. 까마귀 떼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앨런은 극장을 불태우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베티와 함께하려 하지만 베티는 기지로 그를 죽이고 탈출한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평화로운 알프스 산장에서 베티는 마르코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반전으로 불타 죽은 줄 알았던 앨런이 사실 살아있었음이 밝혀지고 산장까지 쫓아온 앨런과 베티는 최후의 추격전을 벌인다. 다행히 앨런의 흔적을 쭉 따라온 경찰들에 의해 앨런이 붙잡히며 베티는 해방되고 영화는 완전한 끝을 맞이한다.
3. 지알로 장르 영화로서의 <오페라>
1987년에 제작된 <오페라>는 지알로 장르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 다리오 아르젠토가 감독한 만큼 영화 곳곳에서 지알로 장르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음악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건 역시 오페라 음악이다. 주인공 베티가 극 중 노래하는 ‘베르디’의 <멕베스> 오페라 음악들 말고도 ‘푸치니’의 <나비부인>, ‘벨리니’의 <노르마>,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오페라 음악들이 영화에 삽입되었음을 엔딩크레딧을 통해 알 수 있다. 들어보면 아름다운 선율에 서정적인 오페라 음악이다. 공포영화에 쓰인 음악으로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특히 영화 속 장면 중 베티가 처음으로 살인마에게 잡혔다가 풀려나는 부분이 그렇다. 끔찍한 살인행위를 강제로 목격하고 공포에 떨며 도망치는 장면인데 음악은 서정적인 아리아가 깔린다. 전 장면을 배제하고 보면 마치 멜로 영화 속 비운의 여주인공이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빗속을 방황하는 모양새다. 오페라 음악뿐 아니라 영화에 삽입된 다른 음악들을 찾아봐도 이질적인 느낌은 계속 이어진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면에서 흔히 떠올릴법한 음악은 낮은 두 개의 음을 반복적으로 구성한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영화 <죠스 Jaws>의 메인 테마곡 같은 것이다. 또는 의도적인 불협화음을 구성해 듣는 사람에게 불안한 감정을 유발하는 음악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오페라>에선 밝은 음계로 몽환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앨런의 광적인 살인장면에선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드럼 심벌 소리에 맞춰 베이스와 전자기타 음이 활개를 치는 락 사운드가 등장한다. 보통 이런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장면엔 스산한 배경음이 깔리고 칼을 찌르는 음향 같은 효과음으로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의 강렬한 리듬감을 자랑하는 음악을 배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렇게 클리셰한 음악이 아닌 이질적이면서도 음악 자체로 들여다보면 상당히 공을 들여 완성도 높은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지알로 장르 영화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 중 하나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써스페리아2 Deep Red>, <페노미나 Phenomena>와 미쉘 소아비의 <아쿠아리스 StageFright: Aquarius> 같은 영화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통 지알로 장르는 아니지만, 동시기 루시오 폴치의 <비욘드 The Beyond>나 렘바르토 바바의 <데몬스 Demons> 같은 영화에서도 하이라이트 살인장면에 강렬한 락 사운드를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지알로 장르 영화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잔혹함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오페라>의 첫 번째 살인 시퀀스를 보면 속도감 있는 컷 편집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걸 볼 수 있다. 신나는 락 사운드가 흘러나와도 이 영화가 공포감을 주는 건 음악만큼 리드미컬하게 안구가 쉴 새 없이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이미지 하나하나만 뜯어봐도 강렬하다. 피해자인 베티의 남자친구가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하며 피를 쏟는 컷과 보기만 해도 날카로운 바늘을 테이프로 눈 밑에 붙인 베티의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 컷이 번갈아 등장한다. 베티의 불안한 동공 앞에 날카로운 바늘이 덧대 보이는 배치는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주는 잔혹함이 상당하다. 두 번째 살인 시퀀스도 비슷하게 진행된다. 대신 잔혹함이 배가 됐다. 두 번째 살인의 피해자인 여성을 살해하는 과정에서 살인마의 정체를 들킬 수도 있는 금속이 피해자의 입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걸 꺼내기 위해 살인마는 큰 가위로 피해자를 난도질한다. 마찬가지로 살인장면의 컷과 익스트림 클로즈업 된 베티의 눈에 더해 피해자 여성의 입도 익스트림 클로즈업된다. 또 지알로 장르 영화답게 잔혹함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아름다운 미장센을 포기하지 않는다. 첫 번째 살인 시퀀스는 베티의 남자친구의 삼촌 집이라는 공간에서 진행된다. 말만 삼촌 집이지 공간은 고풍스러운 미술관의 느낌이 가득하다. 일단 넓은 궁전의 방 안 같은 공간에 벽면은 비싼 회화 액자가 가득 차 있고 느낌 있는 실내 장식과 고급 촛대들이 곳곳에서 분위기를 더해준다. 조명도 흡사 미술관처럼 은은하고 따뜻하게 공간을 비추고 있다. 이 삼촌 집은 영화를 통틀어 딱 한 번 등장하기 때문에 감독이 첫 번째 살인 시퀀스를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찍으려고 일부러 이 공간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살인 시퀀스는 오페라 극장의 의상제작실에서 진행된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웅장한 오페라 극장의 의상제작실인 만큼 넓은 공간에 화려한 의상과 과하지 않게 알록달록한 색감의 실과 원단들이 공간에 가득하다. 이외에도 책상 위마다 올려져 있는 재봉틀과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잘린 원단 조각들이 공간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다. 조명은 의상 제작에 쓰인 책상을 집중적으로 비춰주고 있는데 첫 번째 삼촌 집과 마찬가지로 은은한 느낌이 드나 좀 더 백색광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의상제작실도 영화를 통틀어 살인 시퀀스에서 딱 한 번 등장하고 나오지 않는다. 두 살인 시퀀스를 통해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만큼 예술적인 미장센도 챙기려고 하는 지알로 장르 영화의 특징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4. 지알로 장르 영화의 비판점-<오페라>를 중점적으로
지알로 장르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려 미장센과 음악 하나하나엔 큰 신경을 쓰는 것에 비해 스토리텔링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개연성이 아쉬울 때가 종종 있다. <오페라>에서 살인마인 앨런은 어떤 건물이든 손쉽게 들어가고 은밀하게 기동하며 성공적으로 살인행위를 저지른다. 반면 주인공인 베티는 앨런에게 붙잡혀 끔찍한 살인행위를 목격한 뒤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솔하다. 가장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마르코의 계획으로 까마귀 떼를 풀어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찬 오페라 공연장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아무리 까마귀가 지능이 높고 복수를 할 수 있는 새라지만 우발적으로 까마귀를 죽일 때도 복면 비스름하게 자신을 꼭꼭 숨기고 있던 앨런인데 수많은 사람 중에서 딱 범인을 찾아낸다는 게 좀 찝찝한 마무리였다. 그리고 까마귀가 객석에 앉은 앨런을 찾아내자마자 베티는 무대 뒤편 대기실로 도망쳤는데 까마귀에 눈까지 파먹히고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던 앨런이 바로 베티를 찾아내는 장면도 의문점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오페라>는 <써스페리아2>나 <페노미나>를 비롯한 다른 지알로 장르 영화보다는 스토리텔링에도 신경을 쓴 영화에 속한다. 따라서 영화를 볼 때 명확한 인과관계와 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관객은 지알로 장르 영화가 취향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 지알로 장르의 큰 비판점은 주로 여성들이 피해자라는 점이다. 주인공인 여성은 끔찍한 남성 살인마에 의해 영화 내내 고통당한다. 심지어 피해자인 여성 캐릭터들은 주체성이 떨어진다. 베티는 두 번의 끔찍한 살인을 목격한 후 이 사태가 자신이 오페라 멕베스에 출연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이자 피에 피를 부르는 잔혹한 오페라인 멕베스가 실제로 자신에게 불운을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정신이상자인 살인마의 행위를 멕베스에 출연한 본인 잘못으로 돌릴 정도로 베티는 연약하고 주체성이 떨어지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이런 여성 캐릭터들의 끊임없는 비명을 재미 요소로 삼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요즘 시대상에 비춰보면 지알로 장르 영화는 사회에서 쉽게 수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