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살펴본 <매트릭스: 리저렉션>
영화를 사랑하게 된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항상 대답하는 시점이 있다. 바로 초등학교 때 어떤 학우가 빌려온 비디오를 통해 처음으로 <매트릭스>를 접했을 때다. 물론 영화 전반에 깔린 상징과 영화가 주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영화 내내 보여준 놀라운 상상력과 뛰어난 액션 시퀀스만으로도 한 아이의 인생을 바꿔 놓기엔 충분했다. 이처럼 <매트릭스> 트릴로지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매우 큰 작품이다.
그래서 <매트릭스>의 속편이 제작된다는 사실을 처음 기사로 접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로렌스 피시번'의 '모피어스'가 빠져 아쉽지만 '키아누 리브스'의 '네오'와 '캐리 앤 모스'의 '트리니티'를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자체가 기뻤다. 그러나 이내 완벽하게 끝내 놓은 <매트릭스> 트릴로지에서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더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어설프게 만들었다가 오히려 원작의 감흥마저 헤치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더불어 <매트릭스> 트릴로지 이후에 '워쇼스키' 자매가 연출한 영화들은 그다지 센세이셔널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번 주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개봉했다. 기대와 우려를 안고 혹여나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받을까 영화와 관련된 정보나 리뷰를 일절 찾아보지 않은 채 영화를 관람했다. 그 후기를 이번에도 키워드를 통해 나름대로 풀어가 볼까 한다.
게임 매트릭스를 만들어 세계 최고의 게임 개발자로 이름을 날린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 그의 앞에 자신이 만든 게임 속 캐릭터였던 '모피어스(야히아 압둘 마틴 2세)'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벅스(제시카 헨윅)'가 나타난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빨간약을 선택하고 자신을 따라오라는 벅스의 말에 응한 토마스는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대략 70년쯤 시간이 흐른 현실세계에서 눈을 뜨고 네오로서의 기억을 되찾는다. 그리고 벅스 일행에 의해 구출되면서 여전히 매트릭스 세계 안에 갇힌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를 보게 된다. 트리니티를 이대로 놔둘 수 없는 네오는 그녀를 구출하고자 한다. 전 편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네오와 트리니티는 어떻게 살아 있었던 것이며, 그 이후 기계와 인간의 싸움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갔던 것일까? 그리고 네오는 다시 만난 트리니티를 구출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전작인 <매트릭스> 트릴로지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로 가득하다. (영화 속에서 아예 대사로 '노스탤지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글에선 그냥 노스탤지어로 전부 통일하려고 한다. 시작부터 초록색의 소스코드들이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매트릭스> 1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봤던 장면이 유사하게 재연된다. <매트릭스>의 팬이라면 검은 가죽옷에 선글라스를 낀, 첫 액션부터 끝내주던 트리니티의 강렬한 첫 등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구성상 새로운 젊은 모피어스를 등장시키기 위해 꼭 필요했다. 반복되는 재연 장면에 수상함을 느낀 벅스가 뒤를 쫓다가 요원들에게 발각되고 그로 인해 스미스 요원과 모피어스의 프로그램이 섞인 채로 존재하던 젊은 모피어스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다른 이야기지만 게임 속 모피어스가 스미스 요원과 모피어스가 섞인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보며 변증법이 떠올랐다. 정반합을 노린 설정 아닌가!) 시리즈의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 구성상 꼭 필요했던 시퀀스를 <매트릭스> 1편과 유사하게 가져가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게임 속 캐릭터에서 탈프로그램화 한 모피어스가 등장하고부터 제대로 관객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과거 회상이 몇 씬 들어가더니 나중엔 아예 커튼 모양을 한 배경 스크린에 영화 장면을 그대로 틀어주고 있다. 과거 '모피어스(로렌스 피시번)'를 만나 빨간약과 파란 약의 선택을 앞둔 네오의 모습이 배경에 깔리고 그 앞에서 젊은 모피어스와 네오가 똑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수의 액션 씬과 회상 씬, 그리고 직간접적인 언급을 통해 <매트릭스> 트릴로지를 향한 노스탤지어가 끊임없이 자극된다.
처음엔 팬의 입장에서 이런 노스탤지어의 자극이 나쁘지 않았다. 옛 생각도 나고 현재 모습과 비교하는 것도 나름 재밌었다. 그런데 영화 끝까지 이런 스탠스를 유지할 줄은 몰랐다. 원래 옛 친구를 만나 추억팔이 할 때도 한두 번이나 재밌지 하루 종일 하고 있으면 지겹다. 그리고 영화 자체가 노스탤지어에 갇혀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외적으론 기술이 발전해 영상의 퀄리티가 확 달라졌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나 캐릭터 등등 내적으론 그다지 새로울 게 없었다. 예를 들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네오는 <매트릭스> 1편에서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쳐들어갔던 유사한 장소에 들어가 옥상으로 올라간다. 이 옥상에서 이제 '매트릭스'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몸을 뒤로 젖혀 총알을 피하는 명장면이 탄생했다. 그런데 <매트릭스: 리저렉션> 옥상에선 어떤 일들이 펼쳐졌나? 1편이 끝내주게 멋있었다면 4편은 끝내주게 멋이 없었다. 전편과 유사한 배경들을 통해 노스탤지어는 계속 자극하는데 새롭게 보여주는 게 없다. 그래서 영화가 노스탤지어라는 매트릭스에 갇혀버린 양 답답하게 느껴졌다.
메타픽션이란 기존의 소설에서 보이던 플롯 전개와 시점, 서술 방식 등의 형식과 기법들을 거부하면서 현실이 가지는 확정성을 붕괴시키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최근 소설의 한 경향이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메타픽션이 나타나며 허구(영화의 이야기)를 규정하는 현실성의 붕괴를 지향한다. 영화 초반부에 메타픽션과 관련한 내용이 많았다. 일단 매트릭스 속에서 토마스 앤더슨으로 살아가는 네오가 매트릭스라는 이름의 게임을 개발했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심지어 게임을 3부작으로 만들었으며 영화 3부작의 내용과 캐릭터들이 게임에서도 동일하다.
영화에선 토마스 앤더슨에게 게임 매트릭스 3부작을 잇는 속편 게임을 만드는 임무가 하달된다. 이 씬을 보면서 어쩌면 현실에서 '라나 워쇼스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영화를 만들게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속편을 제작하는 과정을 그대로 영화 속 매트릭스 세계에 구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매트릭스: 리저렉션>을 만드는 라나 워쇼스키의 마음이 그대로 투영된 것 같은 대사들도 이어진다. 게임 개발자들끼리 회의를 하며 매트릭스는 멋있는 액션이 핵심이고, 그 안에 어려운 상징들도 있어야 하고 어딘가 애매모호해야 한다면서 각자의 의견을 내세운다. 속편인 <매트릭스: 리저렉션>를 보고 있는데 그 안에서도 속편을 만들려고 개발자들이 애쓰는 씬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겐 허구의 이야기를 규정하는 현실성을 헤칠 수 있는 메타픽션 씬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 나오는 유일한 쿠키영상도 메타픽션의 맥락에서 나온 일종의 개그였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기다린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재미가 없었지만)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이미 완성된 트릴로지에서 굳이 네오와 트리니티가 리저렉션(부활)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이 필요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성공적으로 관객을 설득하진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이 속편으로 인해 기존 트릴로지에선 완결성 있다고 보인 설정도 설득력을 잃을 것 같았다.
네오를 흡수한 스미스 요원이 자멸하고 매트릭스 세계에 평화가 온 <매트릭스: 레볼루션> 이후 살아남은 인류와 기계 사이에 합의점을 찾고 평화가 온 줄 알았다. 하지만 기계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기존 매트릭스의 창조주 격인 '아키텍트'와 '오라클'이 소멸하고 '애널리스트(닐 패트릭 해리스)'라는 새로운 존재가 관리자가 된다. 이후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매트릭스를 부활하면서 네오와 트리니티도 거대한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고자 부활시킨다. 이 과정이 생략도 많고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매트릭스 시스템 자체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네오와 트리니티를 굳이 힘들게 부활시켜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는 점도 설명이 부족하다.
영화에선 기계와 전쟁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려고만 했던 '시온(Zion)'이 아닌 새로운 도시 '이오(IO)'가 등장한다. 이 이오는 합성지성체라는 이름으로 기계를 부르고 기계와의 공존을 이루며 어느 정도 새로운 세상을 일궈냈다. 이오라는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엔 네오의 희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간 시온은 1%의 매트릭스 부적응자들을 관리하려는 기계(센티넬)들에 의해 6번이나 몰살당했었다. 네오의 희생으로 7번째 멸망을 면한 시온이 거주지를 옮기고 인간에게 호의적인 기계들과 공존한 게 이오다. 애초에 통제된 프로그래밍으로 이루어진 기계가 어떻게 다른 노선을 취할 수 있는지,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매트릭스가 비슷한 환경으로 부활하면 필연적으로 제2의 시온 같은 공간이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이오는 전쟁 한 번 하지 않고 기계들의 눈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독자적인 자생에 성공한(과일 재배, 인공 하늘 등등) 이오가 굳이 전쟁과 더 나아가 멸망이라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네오와 트리니티 구출에 나선 것인지 등 많은 의문점들이 파생되어 따른다.
앞서 언급한 의문점들은 적어도 <매트릭스: 리저렉션>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 부족한 설득력이 속편을 통해 해소될지 아니면 이대로 마무리가 될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매트릭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려면 기존 시리즈에서 보여준 것 이상의 메시지나 설득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대로는 매트릭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하나의 킬링타임용 영화에 그칠지도 모른다. 매트릭스 전작을 안 본 관객들은 아마 킬링타임으로 즐기는 것도 힘들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