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90s , 2018 - 조나 힐 감독
<미드90>은 <문라이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미나리> 같은 웰메이드 영화들을 제작하며 위상을 높인 A24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다. 감독인 '조나 힐'은 할리우드 다양한 영화에서 주로 명품 조연으로 활약한 배우로 이 영화가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푸근한 인상의 조나 힐을 보면 '어디서 본 배우 같은데?' 싶은 익숙함이 들 것이다.
어느 가정집의 복도, 어린 소년 '스티비(서니 설직)'는 자신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형 '이안(루카스 헤지스)'에게 두드려 맞는다. 형은 동생의 가냘픈 몸을 바닥이 쿵쿵 울릴 정도로 사정없이 내리찍는다. 다음 숏에서 스티비는 거울 속에 비친 피멍이 든 자신의 가슴을 눌러보고 때려보며 아픔을 삼킨다. 영화 <미드90>은 이렇게 고통받는 연약한 소년 스티비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배경은 1990년대. 음악은 다 CD를 통해서 듣고 영상은 비디오테이프 VHS로 접하는 시대다. 시대상을 살리고 싶은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는 흔히 접하는 와이드 스크린의 비율이 아닌 4:3 화면비이고 화면의 질감 역시 VHS 느낌의 예스러움으로 채워져 있다.
스티비의 가정환경은 좋지 않다. 아빠의 존재는 영화 내내 알 수 없고 오프닝 시퀀스에서 봤듯 형은 폭력적이고 엄마(캐서린 워터스턴)는 어린 나이에 싱글맘이 되어버린 몸을 파는 여자다. 그래도 엄마는 스티비가 태어난 후부터는 자신의 일을 멈추고 자녀양육에 애쓴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스티비는 우연히 스케이트보드 샵을 발견한다. 거기엔 보드를 타며 거리를 주름잡는 힙한 형들 무리가 있다. 보드도 제일 잘 타고 무리의 리더 격인 흑인 '레이(나-켈 스미스)'와 보드를 잘 타지만 약에 취하고 파티를 즐기는 일에 빠져버린 '존나네(별명이다)', 레이나 존나네랑 비슷한 나이대지만 지능이 4학년 수준이라 '4학년'이라 불리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형, 그리고 스티비가 끼기 전 막내였던 '루벤'이 멤버다. 그 무리에 껴서 어울려 보드를 타고 싶은 마음에 스티비는 아끼던 음악 테이프들을 형에게 바치고 엄마의 돈을 훔치기도 한다. 그렇게 장만한 보드를 매일 연습하고 형들 뒤를 따라다니던 스티비는 형들과 모여 대화를 나눌 때 '흑인도 땡볕에 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때 스티비가 '흑인이 뭔데?'라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내놓았고 이 센스 있는 답을 기점으로 스티비는 형들의 총애와 멤버로서의 인정, 루벤의 시기 질투를 동시에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초반부다. 만화 이불을 덮고 자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엄마와 깊게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남성성과 이성에 대한 관심에 눈을 뜨고 가족 집단을 벗어나 또래 집단 안에서 새로운 사회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성장담에 보드라는 소재는 잘 어울린다. 보드는 처음에 서서 균형 잡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수히 넘어지고 부딪혀야 된다. 보드를 잘 타게 될 쯤엔 전에 입은 상처들은 이미 아물어있다. 보드를 타는 행위는 하루하루 살아가며 성장하는 소년의 인생을 상징하고 있다.
처음 또래 집단과 어울릴 때 느끼는 소속감과 은근한 권력 다툼들도 잘 보여준다. 기존 막내 포지션이었던 루벤은 스티비를 챙겨주는 척하면서 무수히 그를 견제하고 이용하려고 든다. 스티비만큼은 아니지만 루벤도 어린아이이기에 영악한 행동이라기보단 그 나이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런 포인트들을 영화에서 과하지 않게 잘 연출해서 보여줬다. 영화에서 스티비가 물을 떠 오는 시퀀스가 방금 말한 것들을 총체적으로 잘 보여준다. 레이가 물을 떠 오라고 루벤에게 시켰는데 갔다 오기 귀찮았던 루벤은 아직 무리에 끼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던 스티비에게 '네가 떠올래?'라며 떠넘긴다. 스티비 입장에선 무리에 낄 수만 있다면 이런 잔심부름도 소중하다. 물을 떠 오려 달려가는 내내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형들과 많이 친해진 스티비는 함께 보드를 타는 것뿐 아니라 파티도 다니고 술, 담배, 약, 여자까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티비는 이전과 많이 달라진다. 친 형 이안과의 관계도 달라진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맞을 땐 맞기만 했던 스티비가 형들과 어울리게 된 후 두 번째로 이안에게 맞을 땐 베갯속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고 벽을 치며 분노를 표출한다. 그 후 우연히 길거리에서 이안과 존나네가 시비 붙게 되고 근처에서 이 과정을 지켜보던 스티비는 이안이 아무런 반격도 못하고 뒤돌아 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 스티비가 술에 취해 돌아온 날 이안과 세 번째 싸움이 붙는데 더 이상 스티비는 맞고만 있지 않는다. 스티비는 냉장고에서 큰 물통을 꺼내 그대로 이안의 얼굴을 가격한다. 난생처음 동생에게 반격을 당한 이안은 얼굴을 옷에 파묻고 엉엉 운다. 언젠가는 청산되었어야 할 형제 관계의 폭력은 스티비의 성장과 더불어 막을 내린다.
그리고 스티비는 레이와의 관계를 통해 부재한 아빠나 폭력적인 형에게선 얻지 못하는 인생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때문에 레이는 마치 유사 부자/형제 관계처럼 느껴진다. 스티비가 보드를 타다 머리가 깨지고 술에 취해 들어와 형을 때리고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자 화가 난 엄마는 레이 일행이 있는 보드 샵으로 스티비를 끌고 간다. 자신이 동경하는 형들 앞에서 엄마가 자신을 끌고 가 '우리 아들은 너네랑 다르다며, 내 아들과 어울리지 말라'라는 말을 하는 자체가 스티비 입장에선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의기소침해져 혼자 있던 스티비에게 레이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살다 보면 자기 인생이 최악으로 보여 근데... 남들의 인생이 어떤지 보면 네 인생하고 바꾸기 싫을 걸?
그러면서 레이는 스티비가 몰랐던 자신과 아이들의 불우한 가정사를 들려준다. 힘들 때 누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며 스티비를 일으켜주는 레이. 그리고 함께 보드를 타며 시간을 보낸다. 해는 저물어 보랏빛을 띠고 있고 좌우로 차가 다니는 도로 한 중앙에 보드를 탈 만큼 널찍한 공간, 레이와 스티비가 함께 보드를 타는 씬은 영화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던 순간이다.
영화의 후반부, 술과 약에 취한 상태로 위험한 운전을 하던 존나네는 결국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조수석에 앉은 스티비는 생사를 오갈 정도로 심하게 다친다. 비교적 경미한 부상에 그친 나머지 레이 일행은 스티비를 걱정하는 마음에 집에 가지도 않은 채 병실 밖 대기 공간에서 잠을 자며 밤낮으로 기다린다. 그 모습을 본 스티비의 엄마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레이 일행에게 다가가 "스티비 보러 들어올래?"라고 묻는다. 팔에 큰 깁스를 두른 채 누워있는 스티비에게 레이가 또 말을 건넨다.
너처럼 세게 부딪히는 애는 처음 봐. 그럴 필요 없어.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옥상을 뛰어넘는 위험한 보드 타기에 도전하고 새로 배운 유흥을 탐닉하며 거센 인생의 성장기를 보내고 있는 스티비를 억제해주는 레이였다. 레이의 말은 참 따뜻하고 위로가 된다. 스티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빠나 형 심지어 엄마조차 해주지 못한 조언이었다.
배우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스티비를 연기한 서니 설직은 조나 힐 감독의 분신 같은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한다. 때로는 그냥 귀여운 인상의 소년 같으면서도 인생의 풍파를 겪고 레이와 함께 헤쳐나갈 땐 나이대보다 성숙하고 농익은 연기를 선보인다.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소년이라는 어려운 연기를 잘 소화해낸 서니 설직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스크린에 모습을 비칠지 궁금하다.
레이, 존나네, 4학년, 루벤 등등 스티비와 어울리는 형들은 전부 신인 배우들이다. 얼굴들이 신선해서 그런지 이들이 연기한 캐릭터들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안을 연기한 루카스 헤지스는 분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도 캐릭터성을 잘 보여줬고 엄마 역을 맡은 캐서린 워터스턴도 등장할 때마다 몰입도 높은 감정 연기를 보여주었다.
<미드90>은 어린 나이의 아이가 접하기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그런 성장담이다. 하지만 앞서 인생을 보드에 비유한 것처럼 스티비는 많이 넘어지고 세게 부딪혀도 봤다. 이제는 상처가 아문 후에 보드를 잘 타러 가면 된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의 결말에서 4학년이 찍은 자신들의 영상을 다 함께 보는 레이 일행의 모습은 자못 희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