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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Jan 01. 2022

<티탄> 서로가 서로의 결핍을 채워줄 순간을 향해

TITANE , 2021 - 쥘리아 뒤쿠르노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2020년을 건너뛰고 찾아온 2021년 제74회 칸 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은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전작인 <로우>로 평단과 각종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데 이어 연달아 유의미한 성과를 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로우>는 '식인'이라는 소재 자체에 거부감이 크게 들었어서 영화를 재밌게 즐기지 못했다. 하지만 욕망을 분출하게 되며 성장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자극적이면서 비정상적인 소재로 새롭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놀라운 감독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명망 있는 상도 타고 식인이 아닌 다른 소재를 들고 나온 <티탄>은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기대한 대로 <티탄>은 2021년 극장에서 본 영화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선사해줬으며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미친 감독이라는 생각을 뇌 속에 각인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린 시절 당한 교통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넣고 살아가게 된 주인공 '알렉시아(아가트 루셀)'. 큰 사고를 당한 이후 알렉시아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자동차와 같은 금속성의 사물을 사랑하는 사물 성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를 막 대하던 남자도 진지한 사랑을 시작해보려던 여자도 상관없이 죽여버리는 냉철한 살인마적 기질을 가진 인기 있는 레이싱 모델로 성장한다. 살인 행각이 결국 꼬리를 밟히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알렉시아는 도망치던 중 10년 전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영상을 보게 된다. 이 잃어버린 아들과 자신이 꽤 닮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알렉시아는 자신이 실종된 아들 '아드리앙'인 척을 하고 아드리앙을 깊이 사랑하는 아버지 '뱅상(뱅상 랭동)'을 만나게 된다.


 먼저 알렉시아가 사물을 사랑하게 된 과정에 주목해보자. 알렉시아가 퇴원한 후 병원을 나오자마자 한 행동은 아버지의 자동차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알렉시아의 사물 성애는 사고 직후 머리에 티타늄을 넣은 뒤부터 생겼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금속인 티타늄이 뇌와 밀접한 머리를 감싸고 신체의 일부분이 되면서 비슷한 금속체들에 사랑의 감정 같은 정서적 교류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표면적인 과정은 이렇다. 하지만 티타늄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보려면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어린 알렉시아가 사고를 당할 때 상황을 보면 영락없는 관심이 필요한 아이다. 운전하는 아버지 뒤에서 방해되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발로 운전석의 시트를 뻥뻥 차고 안전벨트를 풀고 움직인다. 결국 운전에 집중력을 잃은 아버지가 뒤돌아 한소리 하는 순간 사고가 발생한다. 시작부터 이미 알렉시아와 아버지의 관계에 날 선 긴장감이 맴돌았기 때문에 끔찍한 사고가 필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아버지가 좀 더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알렉시아를 대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 사고가 오프닝 시퀀스에서 일어나서 파악할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처음엔 아버지와 딸이 차를 타기 전부터 대판 싸워서 서로 감정이 상한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의사인 알렉시아의 아버지 자체가 딸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른 후 성인이 된 알렉시아와의 관계도 전혀 나아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복통을 호소하는 알렉시아를 마지못해 진찰할 때 아버지는 배를 몇 번 눌러보더니 이상이 없다며 돌아선다. 이에 알렉시아가 제대로 좀 더 해보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지만 아버지는 알렉시아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선다. 알렉시아는 아버지를 통해서 받았어야 할 사랑을 받지 못했다. 딸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금속성의 차가움보다도 냉담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티타늄이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보다 따뜻했을지도 모른다. 알렉시아는 그렇게 자신에게 필요한 사랑과 관심을 금속체에게 얻기 시작했고 영화 속에서 자동차와 육체적 관계를 가질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깊게 연결되었다. 알렉시아의 뿌리 깊은 결핍이 기이한 욕망으로 치환됐다.

 추가로 단단한 재질의 티타늄은 금속체 이외의 사랑과 관심을 튕겨내고 막아내기도 했다. 또한 차가운 성질의 티타늄은 알렉시아 본인도 감정이 없는 금속체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알렉시아는 자신이 좋다고 들이대는 사람을 남녀 가리지 않고 살해하면서도 일말의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살인할 때 사용한 비녀를 쓱쓱 닦고는 다시 머리에 끼우고 친부모를 살해할 때도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알렉시아를 둘러싼 단단한 티타늄은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오매불망 찾았던 뱅상을 만나고서야 그 경도가 연해졌다. 뱅상과 알렉시아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였다. 뱅상은 사랑을 퍼주어 줄 자식이 필요했고 알렉시아는 사랑을 퍼줄 아버지가 필요했다. 둘의 만남에 알렉시아의 티타늄 경도가 연해진 건 충분한 설득력을 지녔다. 뱅상은 지역의 소방대장으로 대원들에게 꽤 권위적인 인물이다. 또 50대가 넘은 나이대처럼 보이는데도 동 나이대에 비하면 괜찮은 신체와 체력을 보유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지만 강함을 유지하고 싶어 스테로이드를 매일 주사하고 원하던 대로 턱걸이를 하지 못할 땐 그 무력감에 분노하며 바닥을 내리치기도 할 정도로 집착이 심하다. 그런 그가 또 하나 집착하는 건 바로 아들이다. 아들이 어떻게 실종됐는지 영화에선 알려주지 않지만 추측하건대 뱅상의 무관심 혹은 잘못으로 인해 아들을 잃어버렸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집착이 단순 집착이라기보단 자신의 부족함 혹은 잘못을 만회하기 위한 속죄 행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뱅상은 처음 알렉시아가 자신이 아들 아드리앙이라며 나타났을 때부터 그녀의 거짓말을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뱅상에게 중요한 건 아들의 진위여부가 아니다. 그저 자신이 못다 한 부성애를 마음껏 발산할 대상이 필요했다. 자신을 존경하며 따르는 한 소방대원이 뱅상의 아들의 정체를 의심하며 뱅상에게 알려주려 했지만 뱅상은 들으려고 하지조차 않았다. 후에 산불을 진화하러 나갔을 때 그 대원이 아들 아드리앙이 아닌 알렉시아의 존재를 확실하게 지각하자 뱅상은 그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여버린다. 이런 행동은 이미 뱅상이 아들의 진위여부를 알고 있었으며 그 자체가 뱅상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증거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뱅상은 "네가 누구든 간에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대사를 날렸고 이후 알렉시아의 젖가슴을 봄으로써 그녀가 아드리앙이 아님을 확실히 알았지만 말없이 다시 수건으로 가려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알렉시아는 처음엔 단지 생존을 위해 아드리앙으로 위장했을 뿐이지만 점차 뱅상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아마 집착에 가까운 뱅상의 부성애였기에 알렉시아의 티타늄을 뚫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부성애의 부재로 생긴 결핍을 집착의 부성애로 채운 셈이다. 스테로이드를 과다 주입해 쓰러진 뱅상을 마주했을 때가 알렉시아가 자신의 티타늄의 경도가 연해짐을 확실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알렉시아는 쓰러진 뱅상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죽이는 대신 그의 머리를 무릎에 누이고 "아빠"라고 목소리를 내어 부른다. 그전엔 목소리를 내면 정체를 들킬까 봐 한마디도 하지 않던 알렉시아가 뱅상을 만난 후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순간이었다. 

 다만 알렉시아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성애로 열린 자신의 마음을 이성애와 혼돈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뱅상의 부성애 자체가 너무 강하다 보니 섹슈얼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고 그동안 사물 성애 말고는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알렉시아가 충분히 혼돈스러워할 만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알렉시아가 뱅상에게 키스를 시도하는 장면이 그래서 뜬금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알렉시아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워낙 이미지 자체도 충격적이고 소재도 범상치 않은 영화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판타지 같은 장면은 바로 알렉시아의 임신이다. 그녀는 자동차와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 아이를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판타지적인 임신은 알렉시아의 사물 성애가 한 생명이 잉태될 정도로 진정성이 있다는 걸 상징한다고 봤다.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그녀에게 사랑이 되어 준 금속체를 통해 사랑을 줄 아이를 얻게 되었다는 게 재밌는 부분이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마지막은 알렉시아의 출산이다. 그녀가 아이를 낳는 모습은 상당히 기괴하다. 배가 갈라지는데 그 안엔 티타늄이 둘러싸고 있고 피 대신 새까만 엔진 오일이 흘러내린다. 힘을 줄 때마다 그녀 몸 안의 티타늄들이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펼치듯 존재감을 드러낸다. 끝내 아이가 태어났을 땐 배와 함께 속 안에 둘러싸인 티타늄도 찢어졌고 알렉시아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놀랍게도 자동차와 알렉시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만 티타늄으로 구성된 척추가 등 뒤에 튀어나와 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알렉시아처럼 사물 성애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 아이에겐 누구보다 사랑을 줄 대상을 필요로 하는 뱅상이 있기 때문이다. 알렉시아는 자신의 티타늄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지만 그녀가 남긴 아이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해보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티탄>은 영상 자체의 수위도 세고 소재도 충격적이다. 시체스영화제라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겠지만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인 영화이다. 심사위원들이 <티탄>의 어떤 점을 높게 사서 상을 줬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글을 쓰는 사이에 어느덧 2021년이 지나가고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새해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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