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벨룸>의 '안테벨룸(ANTEBELLUM)'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남북 전쟁 전의'라는 뜻이다. 홍보 전단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남북전쟁 발발 직전의 폭풍전야 같던 긴장된 시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우리를 안테벨룸의 생생한 순간으로 이끈다. 백인이 허락하지 않을 땐 단 한마디 말도 할 수 없고 시키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며 도망치는 순간 끔찍한 형벌이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그 시절 노예의 삶이 펼쳐진다. 주인공인 '이든(자넬 모네)'은 흑인 사회에서 나름 알려진 인물처럼 묘사된다. 뒤늦게 목화 농장에 끌려온 노예 '줄리아'와 아내를 잃은 남편 노예는 이든을 찾아와 혁명을 논한다. 하지만 이든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탈출을 감행할 용기와 실행력을 얻을 때를 기다리는 듯 보인다.
이든은 장군님으로 불리는 농장주에게 범해진 후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이때 배경과 상당히 이질적인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이후 영화의 시점은 갑자기 현대로 넘어온다. 현대에선 '이든'은 '베로니카'라는 이름의 저명인사다. 흑인,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책도 쓰고 강연도 다닌다. 그녀에겐 사랑스러운 남편과 딸도 있다. 강연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는 날, 베로니카에게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아침부터 '엘리자베스(제나 말론)'라는 기분 나쁜 여자가 심기를 거슬리고 호텔 방엔 누가 보내었는지 모르는 목화 화분이 와있고 '허락 없이는 말하지 말라'는 싸한 소녀를 호텔에서 마주친다. 강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베로니카는 친구들과의 자축 파티를 간소하게 벌이고 혼자 귀가하던 중 납치를 당하며 앞서 벌어진 이상한 일들에 종지부를 찍는다.
다시 한번 이질적인 벨소리와 함께 시점이 변경된다. 이번엔 그 이질감이 더 크다. 배경은 안테벨룸인데 벨소리가 울린다. 여기에서 영화는 가장 큰 반전을 선사한다. 관객이 안테벨룸 시기라 생각했던 때가 사실은 현재 시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휴대폰 벨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베로니카가 어떻게 현재 이든이 됐는지 플래시백을 본 것이었다. 이후 영화는 줄리아의 죽음으로 각성한 베로니카가 악인을 처단하고 자유를 쟁취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자막은 미국의 대문호 '윌리엄 포그너'의 유명한 문장이다.
과거는 죽지 않는다. 실은 아직 지나간 것도 아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고 이 말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21세기에 안테벨룸을 불러왔다. 상징하는 바가 명확한 대신 작위성이 올라가는 대목이다. 충격적인 반전을 경험한 순간 우리의 머릿속엔 의문부호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도대체 저런 짓을 벌이는 사람들, 주도자도 이상하지만 병사들은 뭐하는 놈들인지', '다수의 흑인이 납치되고 저명인사까지 사라졌는데 발각이 안된다니' 등등의 생각들이 영화의 감상을 방해한다. 그렇기에 필자는 안테벨룸의 서사와 관련해 나오는 혹평들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편이다. 다만 이 영화에는 작위성을 뛰어넘는 강렬한 메시지가 존재한다.
특히 반전이 공개되고 나선 상징적인 장면이 연이어 나온다. 장군을 찌른 베로니카가 그를 '남부기(남부군을 상징하는 깃발)'에 싸서 현대판 노예제도를 부활시킨 주동자들과 산채로 불 지르는 장면은 아직 죽지 않은 과거에서 존재하는 인종 차별과 억압을 전복시키는 듯하다. 횃불을 들고 걸어오는 베로니카의 모습은 마치 '자유의 여신상'을 방불케 한다. 이어서 그녀는 마찬가지로 노예제도의 주동자인 엘리자베스의 추격을 받는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또 의미심장한 대사를 날린다.
일을 저지르는 건 항상 남자들이고 이를 치우는 건 여자들이지
간단한 대사이지만 이 안에 페미니즘을 함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엘리자베스가 죽는 과정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현대의 페미니즘은 잘 모르겠지만 과거의 영화이론 차원의 페미니즘에선 여전히 '흑인 여성'은 배제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페미니즘은 어디까지나 '백인 여성'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인종적으로도 젠더로도 흑인 여성은 환영받지 못했다. 이러한 과거 사실에 기반해서 필자는 엘리자베스의 죽음이 백인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던 주류 페미니즘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이후 말을 타고 울부짖으며 달려가는 베로니카는 인종과 젠더 모두에서 승리를 거머쥔 상징적인 영웅처럼 느껴진다. 추가로 엘리자베스가 죽을 때 머리를 박는 동상은 노예제를 찬성한 남부군의 총사령관인 '로버트 에드워드 리'였다. 따라서 이 장면은 역사적이고 사상적인 상징들의 교직과도 같았다.
단순히 레이시즘적으로만 보면 메시지도 일차원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여기에 주류 페미니즘의 전복만 추가되어도 메시지는 한층 격이 올라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건 영화 마지막에 나타나는 베로니카의 표정이다. 현실(죽지 않은 과거)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디제시스적 상상력 안에서 이뤄낸 베로니카는 당당한 개선장군 같은 느낌으로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베로니카의 울부짖음은 앞으로도 만연할 이슈들에 대한 필사의 외침처럼 느껴진다. 이는 결의에 찬 외침일까 혹 잠재돼있는 불안감의 표출일까? 베로니카의 이 마지막 표정을 통해 영화는 강렬한 메시지로 귀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