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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Dec 28. 2019

[독서하는 삶 #1] 자기 앞의 생

생이 나를 짓밟고 갈지라도 나는 사랑하며 살리

 자기 앞의 생은 프랑스에 살고 있는 열네 살 아랍인 소년 모모(모하메드)의 이야기이다. 그는 친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 유태인 로자 아주머니에게 맡겨져 오랜 시간 그녀와 그녀가 맡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왔다. 

 누구에게나 생(生)은 유한하고 언젠간 그 끝을 맞이하게 되어있다. 그 끝은 로자 아주머니에게도 찾아왔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건물 꼭대기에 살고 있는 그녀는 이제 계단을 오를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지고 만다. 

 자꾸 정신이 나갔다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모모는 슬프다. 그는 아직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엔 너무 어리다. 


 자기 앞의 생은 소외된 자들을 위한 책이다. 책 속 등장인물 중 현명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하밀 할아버지는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항상 손에 쥐고 있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불쌍한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는데,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가 애정 하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리라' 결심한다. 이런 장면은 마치 영화의 액자식 구성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모모가 등장하는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이미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프랑스지만 프랑스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랍인과 유태인, 흑인 등 프랑스 사회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또 창녀와 성소수자들도 소설의 주요 주인공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엔 그 어떤 가치판단이나 편견이 들어가 있지 않다. 화자가 어린 모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고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로자 아주머니(소설에서 표기는 계속 아줌마지만 사실 나이는 할머니다)와 어린 소년 모모가 힘든 삶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소설이 진행될수록 단순히 가족 같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의미 있는 관계로 발전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자기 앞에 놓인 생을 마감하려 하고 한 명은 자기 앞에 놓인 생의 무게를 체감하기 시작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으니 마치 반대 대칭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둘은 종교마저도 섞일 수 없는 유태인과 아랍인이 아닌가.


 책의 마지막을 덮고선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살아온 환경, 상황, 성격 많은 면이 로자와 다르지만, 로자의 마지막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스쳤다. 건강이 나빠져 운동을 조금이라도 해야 하는데 누가 강제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 끔찍한 고통 앞에 어떻게든 이겨내고 살아가기보단 편안하게 가고 싶어 하셨던 모습.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삶과 죽음에 관한 콘텐츠를 접할 때마다 필자는 허무한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말 그대로 빈손으로 와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채 빈손으로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슬픔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과 해결되지 않은 과업들은 남은 산 사람들의 몫이다. 죽은 사람은 이제 다시는 현실에 개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허무한 감정을 떨쳐버리기 위해 짧은 삶을 살더라도 태어난 의미를 발견하려 애쓰고, 비전과 본질적인 것을 바라보려고 애써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쓰기엔 시간은 너무 아깝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한 삶에는 충만한 의미가 있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이든, 예수님이든 말이다. 필자 앞의 생이 얼마만큼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 속에 로자 아주머니의 생을 나타낼 때 쓰인 말처럼 생이 나를 짓밟고 가더라도 그 짓밟힘 속에서도 나는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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