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 덕분에 영화 <풀타임>을 개봉 전에 보고 왔다. 작년에 열린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타며 이름을 알린 영화다. 이 영화는 사실 몇 달 전에도 볼 기회가 있었다. 올해 열린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올해 영화제를 갔었지만, 영화제 기간 내내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개막작과 폐막작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당시에 조금 더 보고 싶었던 개막작 <애프터 양>을 선택했다. 그때 못내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아쉬움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전체관람가 등급의 스릴러 영화다.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전체관람가는 상당히 생소한 등급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고 영화 내에서 어떠한 폭력도 등장하지 않지만, 일상 그 자체가 주는 무거운 압박감으로 보는 사람의 숨을 탁 막아버린다. 88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주인공 ‘쥘리 루아(로르 칼라미)’의 시점에서 연대기적으로 일상을 보여 준다. 쥘리는 남편과 이혼한 후 자녀 2명을 홀로 키우는 워킹맘이다. 양육을 위해 파리 교외에 살고 있지만, 그녀의 직장은 ‘파리’에 있어서 매일 끔찍한 출퇴근을 반복한다. 5성급 호텔에서 객실관리를 맡은 그녀는 어느 정도 연차도 쌓였고 일도 곧잘 하지만, 더 나은 연봉과 미래를 위해 기업의 면접을 보러 다닌다. 사실 그녀는 원래 시장조사원으로 괜찮은 직급까지 올랐던 경력이 있으나 아이가 생긴 후 육아에 전념하며 경력단절이 생긴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하는 호텔 일은 적성에도 맞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있었다. 바라던 회사와의 면접날, 쥘리 앞에 문제가 닥친다. 파업으로 인해 교통이 마비된 것이다. 열차도 버스도 심지어 택시마저 줄줄이 파업하게 되자 교외에 사는 쥘리에겐 파리까지의 출근부터가 난관이다. 설상가상으로 쥘리가 출근할 때 아이를 봐주는 노부인도 더는 아이를 봐줄 수 없게 됐고 회사엔 교육해야 할 신입이 들어오고 양육비를 줘야 하는 전남편은 연락 두절이다. 그리고 최종 면접날 대타 근무자를 구하지 못한 쥘리가 몰래 빠져나간 것이 들켜 그녀는 해고 위기에도 놓이게 된다.
최근 봤던 영화 중에 <보일링 포인트>라는 영국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한 유명 레스토랑의 주방과 서빙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상황들을 원테이크라는 현장감 넘치는 촬영기법으로 쭉 보여 주고 있다. 영화 제목처럼 끓는점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풀타임>도 이와 비슷한 유형의 영화다. 다만 다소 작위적인 상황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보일링 포인트>에 비하면 <풀타임>의 사건들은 훨씬 더 현실적이다. 그리고 쥘리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마저도 현실적이다. 영화적인 표현으로 그녀에게 어설픈 행복을 안겨주지 않는다. 혹자는 <풀타임>의 결말에서 호텔 일을 잘리고 원하던 회사에 취업한 것은 영화적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역시 매우 현실적이고 해피엔딩이 아닌 또 다른 새드엔딩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쥘리를 보면 이미 기존의 커리어를 통해 입증된 실력이 있고 그 바쁜 시간에도 면접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마지막 면접에서 인사담당자가 ‘경력이 훌륭하다’라며 치켜세울 정도니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 따라서 쥘리가 면접에서 합격한 것은 그리 영화적인 설정은 아니다. 경력도 없고 모든 조건이 최악인 사람이 단 하나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서 기적적으로 대기업에 입사하는 행복한 이야기랑은 거리가 멀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원하던 회사에 들어간 쥘리에게 꽃길이 펼쳐질 것이냐는 문제다. 내내 일로 바쁘던 쥘리는 짧은 며칠의 시간 동안 아이들과 함께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던 파리 놀이공원을 큰맘 먹고 함께 간다. 그동안 일에 치여 살았지만, 쥘리의 삶의 원동력은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심 아이를 봐주던 노부인이 ‘이렇게 사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라며 사회복지과를 언급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아이를 위해 일하지만, 일 때문에 아이를 전혀 돌볼 수 없는 상황은 이혼한 워킹맘이 처한 가장 큰 역설이다. 쥘리는 파리의 놀이공원에서 새 회사 합격 소식을 듣는다. 새로운 회사로 가면 연봉은 오르겠지만, 일 자체가 많아 호텔에서 일할 때보다 퇴근도 늦어지고 더 힘들어질 것이다. 즉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부가 해소되었을 뿐이지 그만큼 삶에서 다른 부분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회사의 연락을 받지 못하고 지역 마트에서 캐셔나 다른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나은 결말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다.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다소 염세적인 태도로 느껴질 수 있으나 이것이 가감 없는 현실의 직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구원을 바라곤 한다. 쥘리도 구원을 바랐다. 몰래 호텔을 빠져나와 면접을 볼 때 신입에게 자신의 출퇴근 카드를 대신 찍어달라 부탁했지만, 오히려 그 신입이 해고되고 만다. 그 신입도 쥘리처럼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었다. 교통대란으로 힘들 때 아들 ‘놀란’의 친구인 ‘레오’의 아빠가 그녀를 카풀해준 적이 있다. 레오의 아빠는 놀란의 생일 때 쥘리의 고장 난 온수기를 고쳐주기도 한다. 쥘리는 고장 난 온수기 때문에 매번 주전자에 물을 데워 목욕하곤 했었다. 온수기를 고쳐준 레오의 아빠에게 쥘리는 입을 맞춘다. 이 장면에서 쥘리가 든든한 그에게 호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자신의 힘든 삶에 나타나 준 구원자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실수와도 같은 입맞춤으로 인해 그녀는 레오의 아빠와 멀어지게 된다. 영화에서는 레오의 아빠 말고도 여러 번의 카풀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영화는 누가 쥘리를 카풀해줬는지 운전자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즉 그녀가 호의를 받은 것은 맞지만 집중적으로 조명할 구원자는 아니라는 태도다. 인정사정없는 일상 스릴러 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사람은 나 자신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화를 두 갈래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했듯 해피엔딩은 될 수 없다. 구원자는 없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끝없는 굴레 속 행복이란 허상과도 같다는 걸 느꼈다. 이를 통해 염세적인 태도로 영화의 엔딩에서 쥘리의 눈물은 또다시 바쁜 사회의 톱니바퀴로 들어가게 된 처량한 개인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으며 한 줄기 희망을 좇아가는 것이다. 이 길은 행복이 보장되어 있지 않고 여전히 힘들고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할 기회 속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쥘리의 눈물은 안도와 희망의 눈물일 것이다.
영화를 감독한 ‘에리크 그라벨’은 전주영화제 폐막식 GV에서 이 영화의 엔딩을 놓고 ‘해피 엔딩’을 의도하진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감상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고 싶다. 나 역시 풀타임을 갈아 넣지는 않아도 충분히 곤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일상 스릴러를 살아갈 때 내가 갖추어야 할 태도가 후자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오히려 너무 낭만적이고 낙천적으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행복은 허상일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