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엔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사전 정보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주의 바랍니다.
‘조던 필(Jordan Peele)’ 감독의 신작이 나왔다. 조던 필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겟 아웃>에서 흑과 백으로 나뉜 이데올로기의 공포를 보여 주면서 현대 호러 장르의 주목할만한 감독으로 떠오른 감독이다. (<겟 아웃>과 관련해서는 이전에 쓴 글이 있다. 관련된 링크를 첨부한다. https://brunch.co.kr/@goo0714/41) 차기작인 <어스>에서는 <겟 아웃>의 인종적 관점에 더하여 더욱 계급적으로 들어가서 사회의 병폐를 끌어내고 이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영화 자체에 해석할만한 상징들이 늘어났고 마치 미술관에 온 것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많아지는 영화가 됐다. 그 때문에 서사 자체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게 다소 쉽지 않아 졌다. 혹은 거대한 줄기는 이해가 되어도 잔가지들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계속 생기거나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거리가 많고 각자의 주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주장에 미약하게나마 이론적 근거를 끌어와 보자면 프랑스의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제시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사진을 바라보는 두 가지 해석의 관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다.
여기서 스투디움은 사진을 보는 순간 응시자의 앎의 영역 또는 문화적 영역에서 즉각적으로 번역되고 해석되는 함축적 의미를 가리킨다. 이를 영화에 적용하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자명한 영상이라 모든 사람이 공통적인 사유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푼크툼은 우리(관객)의 기분에 따라 변모하고 출몰하는 무엇, 가변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을 가리킨다. 즉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무엇이다. (김호영, 『영화이미지학』, 문학동네, 2014) 작품을 대할 때, 자신의 주관을 활용해 해석하는 것은 푼크툼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작품을 단순히 수용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 주고 나아가 의미의 확장을 불러올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입장에선 스투디움적인 것보다 푼크툼적인 게 더 좋다고 말한 것이고 실제로 영화를 더 재밌게 볼 수도 있다. 조던 필의 신작인 영화 <놉>은 <어스>처럼 상징도 많고 주관에 따라 해석할 여지가 많은 푼크툼적인 영화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다소 주관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워낙 명징한 상징들이 많다 보니 푼크툼적이라기보단 감독이 의도한 숨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 그칠지도 모른다.
먼저 영화의 큰 줄거리를 언급하면 UFO가 나타났고 주인공인 ‘OJ(다니엘 칼루야)’와 ‘에메랄드(키키 파머)’ 남매는 이 UFO의 사진을 찍어 돈을 벌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 UFO는 하늘을 나는 괴생명체였다. 이게 영화에서의 가장 큰 반전이다. 외계인이 UFO를 타고 날아와 인간을 납치해 실험한다는 등의 괴소문들은 너무 유명하다. 이 내용을 소재로 한 <포스 카인드> 같은 영화도 있다. 워낙에 우리 뇌에 강력한 이미지로 박혀 있기에 접시 모양을 한 UFO가 와서 지상의 물체를 빨아들이면, 외계인이 특별한 자신의 기술로 지구의 대상을 납치한다는 사고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익숙한 이미지가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고정관념을 만들고 이를 깨부수며 반전을 준 것이다. 이 괴생명체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엄청난 흡입력으로 살아 있는 대상을 흡입해 배를 채운다. 괴생명체의 소화기관처럼 보이는 이미지도 나오고 나중에 가면 자신의 신체를 변형할 수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이 괴생명체가 어떻게 지구에 있는지 뭐 하는 생명체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 괴생명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 볼 수 있다.
이 괴생명체가 인상적인 건 근처로 다가가면 최신 전자기기가 모두 먹통이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전기만 끊어지는 게 아니라 배터리로 작동하는 것들에도 이상이 생긴다. 따라서 디지털카메라, 자동차, 휴대폰과 같은 기술과 문명이 선물해준 이기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주인공 일행은 괴생명체를 찍기 위해 필름 카메라를 가져오고 이동 수단으로는 말을 탄다. 여기서 주인공 OJ 남매의 직업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집안은 전통적으로 말을 조련해왔고 조련된 말은 영화 촬영에 동원되었다. 영화라는 매체 초창기에는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여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활동사진이 있었다. 이러한 활동사진 중에 ‘말 타는 흑인 기수’라는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 속 말을 타고 있는 기수가 OJ 남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들 가문은 영화 역사의 산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OJ가 말을 타고 괴생명체를 유인하고 초청된 촬영 감독이 필름 카메라로 이 광경을 찍는 걸 생각해보자. 마치 초기 영화의 역사로 돌아가 다시 그 시절의 작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어쩌면 감독은 초기 영화에 대한 헌사를 바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초기 영화의 헌사라면 괴생명체는 무엇일까? 영화에 비유해보자면 괴생명체는 일종의 스펙터클이다. 그것도 빠르고 강력하고 자극적인 스펙터클이다.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와 같은 독일 철학자들이 비판한 것처럼 현대의 대중문화(영화)는 ‘문화상품’으로서 작용하는 부분이 분명히 크다. 관객들이 많이 보고 돈 되는 영화에서 자극적인 스펙터클은 필수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초기 영화로 돌아가는 주인공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괴생명체는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경계해야 할 스펙터클일 수 있다. 두 번째로 괴생명체는 외계에서 온 생명체로 보기보다는 동물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얼핏 봐도 지구에 없는 생물이라 외계 생물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 초점은 ‘외계’에 맞춰지기보단 이 괴생명체 또한 ‘동물’이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인 말 조련사로 살아온 OJ가 괴생명체의 습성을 깨닫고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과 평소 포식자들의 포식 행위와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는 걸 즐겨하던 촬영 감독이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지 못하고 눈을 들여다보며(괴생명체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대상을 대상으로 삼는다. 더불어 이 생명체와 눈은 흡입하는 입과도 같다. 촬영 감독이 촬영 전에 외눈박이 이야기를 하는 건 복선이다.) 자신이 먹히는 포식 행위를 끝까지 촬영하는 장면은 괴생명체를 동물이라는 개념으로 놓고 생각해도 된다는 방증이 된다. 이 동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의 또 다른 인물인 ‘주프(스티븐 연)’를 볼 필요가 있다.
주프는 어린 아역 시절부터 인기를 얻어 각종 쇼에도 출연한 아시아계 배우이다. 성인이 된 뒤에 그는 테마파크를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는 아역 시절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침팬지 ‘고디’와 함께 하는 쇼에서 발작을 일으킨 침팬지가 난동을 부린 사건이었다. 이때 고디는 무려 주프의 첫사랑 누나의 얼굴을 씹어먹었다. 이 고디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영화에서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고디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손과 입에 피가 묻어있는 침팬지의 모습은 괴생명체가 나오는 후반부를 통틀어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무섭고 강렬한 이미지였다. 이후 고디는 주프가 처음 등장한 장면에서 숨겨진 방의 컬렉션으로 등장한다. 상당히 끔찍한 사건임에도 주프는 컬렉션 방까지 만들고 별다른 외상적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주프는 고디를 본뜬 조형물과 당시 공격당했던 첫사랑 누나가 신었던 피 묻은 신발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이 컬렉션의 의아함은 사건의 전말을 보여 주는 ‘고디’의 이름을 내건 챕터에서 풀리게 된다. 고디가 난동을 피웠을 당시 주프는 책상 밑에 숨어 있었다. 고디는 첫사랑 누나 외에도 현장의 모든 물건과 사람을 때리고 부수며 다녔다. 그때 주프와 고디는 서로 눈을 마주친다. 그런데 고디는 주프에게는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교감하려는 듯 주먹을 맞추려고 했다. 고디와 주프의 주먹이 맞닿으려는 순간 고디는 현장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사살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첫사랑 누나의 피 묻는 신발이 수직으로 서 있었다. 고디가 왜 주프를 공격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피 묻은 신발이 서 있던 건지 실증적으로 알 수는 없다. 혹자는 서양인들이 아시아인을 침팬지에 비유한 것에 기반한 인종차별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인종 이데올로기를 다룬 바 있는 조던 필의 전적을 살펴보면 충분히 그럴싸한 해석이다. 다만 이 장면에선 그 숨은 의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어난 현상을 주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이다.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침팬지, 그리고 서 있는 신발을 주프는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믿으며 흉포한 야생 동물이라도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앞선 믿음으로 주프는 트라우마를 가지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괴생명체를 먼저 발견했음에도 그것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선택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의 관점에서 보면 주프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스펙터클 앞에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수용자로 볼 수 있다. 미디어 이론 중에는 ‘제삼자 효과’라는 것이 있다. 이는 미디어의 메시지가 자신보다는 타인, 즉 제삼자에게 더 강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스펙터클을 충분히 필터링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데 타인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거다. 주프의 태도가 딱 그랬다. 이러한 다원적 무지에 가까운 인식으로 인해 주프는 결국 스펙터클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동물의 관점에서 보면 침팬지처럼 흉포한 동물도 길들였으니 더 흉포한 것도 길들일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파국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등장한 ‘풍선’과 대사로 나온 ‘나쁜 기적’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풍선은 잘 늘어나는 재질 안에 공기로 가득 찬 물체이다. 부피는 있어 보이지만, 그 속은 공허한 허상이다. 영화 속에서 풍선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먼저 고디가 난동을 피울 때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풍선이다. 풍선이 터지는 소리에 고디가 반응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생명체를 유인할 때, 처치할 때 쓰이는 것도 풍선이었다. 왜 풍선이었어야 했을까? 앞서 풍선을 허상이라고 보았을 때 생일파티에서 터진 풍선은 인간의 잘못된 믿음, 교만이 터졌다고 볼 수 있다. 침팬지를 길들여 시트콤을 찍을 수 있다는, 즉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과 교만이 무너짐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괴생명체에게도 풍선은 생명체라면 다 잡아먹을 수 있다는 믿음과 교만의 폭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추가로 괴생명체를 스펙터클로 본다면 결국 사람들을 사로잡기 위해 스케일만 키운 스펙터클은 허상이나 다름없고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영화에서 ‘나쁜 기적이라는 것도 있을까?’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나쁜데 기적이라니 모순되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영화 속 나쁜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우선 주프가 고디의 잔혹한 난동 속에서 보았던 서 있는 피 묻은 신발도 나쁜 기적으로 볼 수 있다. 상황 자체는 최악이었지만 그 속에서 주프는 비록 잘못된 믿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기적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괴생명체의 등장이다. OJ의 아버지가 이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OJ는 괴생명체를 촬영해 떼돈을 벌 기회를 얻었으니 나쁜 상황 속 기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나쁜 기적은 얼핏 보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끝이 어땠는지 살펴보면 이를 과연 기적이라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얻은 달콤함을 맛보다 결국 죽음이든 치열한 사투든 그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에 가깝다. 기적이나 나쁜 기적이나 판단의 주체는 인간의 인식이다. 똑같이 벌어진 현상에 어떤 프레임을 씌우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영화에서 물었던 것처럼 나쁜 기적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스펙터클에 잡아먹힌 주프나, 허상 같은 스펙터클을 붕괴한 OJ처럼 수용자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조던 필은 초기 영화 속 흑인 기수와 같은 모습으로 늠름하게 서 있는 OJ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스펙터클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