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교에 다니게 되면 연출을 희망하는 학생은 피칭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이 만들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어떻게 만들 것인지 발표자료를 준비해서 발표해야 한다.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은 영화 연출학생들에게는 시험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다들 긴장도 많이 하고 준비도 많이 했다. 나는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피칭을 지도해주는 교수님과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꾸 지적만 받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이도 어리고 '저분이 역량이 있나?' 라는 의구심이 나를 더욱 더 교수님과의 대화나 프로젝트 진행에 소극적으로 임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주변 참여한다는 친구들과 뭔가 준비되지 않은 느낌으로 준비했고, 피칭했다.
피칭할 때 공원에서 촬영한다는 것, 촬영허가를 아직 받지 않은 점, 불을 사용한다는 점, 저녁에 촬영한다는 점, 출연진이 5명 이상이라는 것 등 지적사항이 끊임없었다.
그리고 나는 떨어졌다.
왜 떨어졌을까?
내가 영상 경력이 부족해서? 무슨 소리야. 18살짜리 애도 선정됐는데.
스토리가 별로라서? 무슨 소리야. 내가 40일 가까이 스페인 산티아고 가면서 느낀 생생한 감정을 넣었는데.
영어가 별로라서? 그랬을까? 좀 어버버하긴 했다.
정말 속상했다. 영화 만들려고 토론토에 왔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를 만들 수 없도록 하다니. 그리고 학기가 끝나고 일주일 정도 학교 방학이 시작되었다. 나는 기분도 전환할 겸 토론토에 가까운 뉴욕에 가기로 했다. 4월 초라 약간 쌀쌀한 느낌도 있었다. 그래도 뉴욕이라는 도시는 매력적이었고, 잠시 그 여행에 취해있다가 일주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니, 그렇게 싫었던 토론토도, 그렇게 서운했던 교수님들도, 그렇게 속상했던 프로젝트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다시 팀을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학교 주최 영화제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학생들이 다 갈 줄 알았는데 가지 않은 학생들은 또 가지 않았다. 나는 왜 가지 않는지 궁금했다. 아마, 가지 않은 학생들은 자신들의 창작활동에 몰두해 있거나, 일 때문에 못 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몇몇 친구와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 장소는 매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극장이었다. 영화관은 정말 근사했다. '이런 곳에서 영화를 상영하면 얼마나 근사할까?' 라고 잠시 상상을 했었다.
브로셔를 보니 졸업생과 재학생이 만든 영화들도 있고, 뮤직비디오 파트도 있었다. 거기에 내가 만든 뮤직비디오도 있었다. 경쟁이었기 때문에 수상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대가 전혀 없었다. 지난번 피칭에서 패널들의 반응을 봤을 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갔던 친구 중 한 명인 프랑스인 마리옹은 본인의 뮤직비디오가 선정되면 할 스피치를 핸드폰으로 적고 있었다. 귀여웠다.
영화제 영화들은 학생들의 패기가 넘치는 것도 있고 조금 아쉬운 것도 있었지만, 나름 다 의미와 재미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아마 제작자라서 그런지 더욱 그랬을 것이다.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베스트 다큐멘터리, 베스트 뮤직비디오, 베스트 쇼트 등이 수상되었는데, 갑자기 베스트 뮤직비디오를 수상할 때 내 이름이 불리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고, 아마 핸드폰을 두들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옆에 친구들이 나를 흔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을 수여하는 교수님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Asher, The winner of the best music video, is working in the film industry, so he's not here today." "뮤직비디오 대상 애셔는 현재 영화업계에서 일하고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일 하나도 없는데.'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서 흔들었다. 교수님이 나를 보고 웃으면서 저기 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어리둥절했다. 예전에 단편영화 피칭을 하고 떨어졌을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단상에 올라가 수상소감을 말했다. 그 순간 떨리기보다는 '왜' 나한테 이 상을 줬을까 생각을 하면서 선정자분들과 극장에 계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뮤직비디오를 함께 찍은 지우, 한별, 한나가 의기소침해 있던 멀리 타지의 나를 보고 '선생님 힘내라'고 응원해준 것은 아닐까 라고 혼자 생각해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에서 어떤 흔적을 만드는 지가 나를 예상치 못한 근사한 곳으로 데려다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수상 소감
< 내가 정말 좋아하는 브루노 교수님.
뮤직비디오 대상 후 찰칵>
<친구들 및 새로 만난 영화제작자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