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교직을 뒤로하고 토론토에 갔을 때 설레면서도 두려웠던 이유는 내가 영어로 단편 영화를 연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영어를 꽤 오랫동안 공부했고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외국인들과 함께하는 영어 환경, 그리고 문화가 다른 영화현장에서 현장 영어를 사용하면서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기회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 전에 한 번 가봤던 곳에 가서 매듭을 짓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급하게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걱정과 고민이 참 많았던 기억이 있다.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서 글을 써보기도 했지만 결국 내 글을 썼다. 참 어렵게 억지로 짜내듯 썼다.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출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시나리오 피칭을 해야 영화 제작이 학교로부터 승인이 나서 제작 관련 보험 지원도 받고 장비 지원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학교 중간에 합류했기 때문에 아는 학생도 없었고, 어색했지만 주변에 한 명 한 명 물어봐서 단편영화 제작에 참여해줄 수 있는 팀을 모았다. 팀은 조금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래도 간절한 건 나였기에 이 팀과 함께 피칭을 준비했다.
피칭을 하는 날 팀별로 5분이 주어지는데, 다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장비 대여 촬영 날짜 때문에 모두에게 대여해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나는 괜히 다른 학생들과 나를 비교했다. 연출을 희망하는 학생들 중에서 비영어권 학생은 나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팀별로 피칭을 했고, 우리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출자에게는 1분 30초 동안 피칭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나는 이것을 준비하려고 며칠 동안 하루에 4시간 넘게 야외에서 피칭 연습을 했었다. 그리고 우리 팀은 피칭을 했고, 예상치 못한 질문들 그리고 지적들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 결과 공표가 났을 때 우리 팀 이름은 없었다. 누군가 최선을 다하고 실패하면 후회가 없다는데, 난 후회는 안 하는데 화가 많이 났다. 왜 안되었는지.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방법을 찾아야지. 영화 찍어보려고 한국에서 캐나다 토론토까지 왔는데 말이다. 나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내 어려운 처지를 이야기하고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내 처지를 딱하게 여긴 장비관리팀 직원이 추가로 응모해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관련 정보를 알아보았고, 나를 떨어뜨린 교수님들 말고 새로운 교수님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새로운 팀을 구성했고, 제작이 용이한 컨셉으로 단편영화 이야기를 구성해서 피칭을 다시 했다. 결국 승인이 되어 나도 단편영화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승인을 받아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생각만큼 준비가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준비 정도와 함께 일하는 제작진들의 진행 정도가 달랐다. 몇몇 제작진은 너무 좋았지만 몇몇 제작진은 촬영 전 준비할 때 내가 원하는 만큼 해주지 않아 속이 타들어갔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 다 내 마음처럼 되지 않지.
그래도 시간이 지나 촬영날이 되었다. 촬영을 개시하려는 찰나 제작진에서 장비를 학교에서 챙기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 촬영이 한 시간 반 정도 지연되었다. 그때 학생들이 프로덕션을 잘 운영하는지 관리하는 프로덕션 슈퍼바이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촬영장비가 도착하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처음 몇몇 장면들을 촬영하면서 촬영장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마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내가 이거 하려고 토론토에 왔지.'
이런 희열을 상상하고 토론토에 왔고, 그것을 눈앞에 현실로 만들어 느끼는 순간 내 아드레날린은 치솟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나고 나중에 프로덕션 슈퍼바이저에게 연출 지도 및 촬영 진행 관련해서 한 소리 들었지만 나에겐 아름다운 촬영 기억으로 남았다. 초등교사 휴직이라는 결단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