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를 흔드는 진동에 눈을 떴다. 침대 칸 문 위에 있는 모니터에는 10분 후 파리북역에 도착한다는 안내가 떠 있었다. 모든 건 단지 꿈이었다. 하지만 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뜬 채 꿈을 복기하고 있었다. 도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그만두라는 부탁, 그리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만이 남았다. 비단 꿈이라고 해도 명령보다 강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맞은 편의 프랑스인 연인들은 부산하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몇 시간을 같은 노래만 듣고 있었을까? 이 노래가 나에게 이런 가혹한 꿈을 가져다준 걸까 생각했다. 기차가 드디어 멈추고 나는 연인들을 따라 역사로 나왔다. 드디어 목적지인 파리에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하여 만 하루가 넘어 도착한 목적지이지만 나에게 파리북역에서의 기억은 당최 남아 있지 않았다. 파리에 도착해서도 오랫동안 나는 꿈속에 갇혀 있었다. 꿈속에서 만난 도이의 망령에 홀려 기억을 빼앗겨 버렸었다.
아직 빼지 않은 이어폰 때문이었을까? 나는 파리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생경한 이 도시에서 모든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었다. 이어폰을 뺄까 했지만 나는 이 도시에 어울릴 음악을 골라달라고 명령했다. 귀에서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여가수가 내레이션을 하였다.
<Message Personnel>
샹송이었다. 불어 제목이었지만 ‘personal message’라는 의미라고 유추되었다. 가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노래는 지나치게 슬펐다. 이 노래가 파리에 대한 감상을 합의점 없이 강요해 버렸다. 노래를 끄고 싶었지만 도저히 끌 수 없었다. 이 노래가 멈출 때까지 나는 지하철역 입구 앞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노래가 멈추자마자 나는 이어폰을 빼버렸다. 노래는 제멋대로 내 감각들에 색깔을 칠해버렸다. 이어폰을 빼고서야 파리의 소리가 들리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엄마가 예약한 호텔로 가기 위해서 생미셸노트르담역으로 가야 했다.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가자 벽면을 가득 채운 그라피티가 파리에 대한 나의 환상을 무너뜨렸다. 지하철을 타고 창밖으로 보이는 터널 벽면마저 그라피티로 뒤덮여있었다. 이곳엔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가 작업을 한 건지 궁금했다. 지하철은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생미셸노트르담역에 도착했다. 파리에 온 걸 후회하고 있었던 나는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마음이 바뀌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길 건너 보이는 생미셸분수와 센강 건너의 모든 건축물들은 왜 사람들이 파리라는 도시를 사랑하는지 알게 해 주었다.
나는 센강을 따라 호텔로 걸어갔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따뜻했다. 이대로 이 여행이 끝난다고 해도 아쉬움이 없을 만큼이었다. 내 안에서 위치를 잃었던 감정의 조각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키가 큰 파리지앵들이 센강을 따라 조깅을 하고 있었다. 몇 분 걷지도 않고 나는 호텔에 도착했다. 엄마가 준비해 준 서류들을 스캔하고 나는 방을 안내받았다. 센강 뷰를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내게 배정된 방은 호텔 중정뷰였다. 작은 책상, 작은 침대, 2인용 작은 소파가 있는 작은 방이었지만 충분했다. 나는 가방을 벗어두고 다시 호텔 밖을 나섰다.
호텔 앞으로는 퐁네프다리가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퐁네프다리밖에 없었다. 아마 그만큼 유명한 다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VR글라스는 강 너머 루브르박물관을 표기해 주었다. 서류상의 파리 방문목적인 루브르박물관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났다. 호텔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퐁네프다리는 어떤 특별한 역사와 의미가 있길래 내가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 멀리로 보이는 에펠탑을 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 옆에 서서 겨우 보이는 에펠탑을 보고 있었다. 이곳이 서울이었다면 나는 모르는 사람들 옆에 서서 같은 곳을 볼 용기가 있었을까? 아니면 내가 변한 걸까? 생각했다. 아마도 서울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았다. 에펠탑을 바라보던 두 남자는 키스를 했다. 내가 옆에 서 있는대도 두 남자의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는 그곳에서 뒷걸음치며 나와버렸다. 실제로 사람이 키스를 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 처음이 파리의 퐁네프다리 위 두 남자의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