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실이 모여 있는 C동의 5층은 너무나 조용했다. 열린 복도의 창밖으로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창 밖으로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의지로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은 시각밖에 없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눈앞에 붉은 잔상이 가득했다. 잔상은 페트리접시 위의 원생동물의 움직임처럼 제멋대로였다. 그러다 불길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소피카의 환영이 있었다. 소피카는 나를 바라보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는 이렇게 컸는대도 소피카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 기억 속의 소피카가 나도 모르게 자랄 리 없었다. 소피카는 나를 보고 웃으며 뒤돌아 사라졌다.
건물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나의 뇌는 시각정보를 전혀 처리하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다 심재연 교수가 남겨준 번호가 신경 쓰였다. 13통의 부재중 전화를 무시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한다는 건 오히려 어렵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화벨은 길게 울리지 않고 받았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심재연 교수님이 알려주신 번호가 있어 전화드려봤어요.”
“그래요? 지금 어디예요?”
“C동 앞이에요.”
“아, 시간 괜찮으시면 4호관 501호로 오세요.”
“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네.”
누구인지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 너머로 여러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남자가 오라고 한 4호관 501호를 찾아 올라갔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4호관과 5층을 올라가는 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도 알지 못했고 만나게 될 사람들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창춘행 기차를 타고 떠났던 그날처럼 설레었다. 501호 앞에 도착하여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옆방에 502호로 표기되어 있어서 501호라 생각했지만 문에는 파란색 귀 모양의 문양이 붙어 있을 뿐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그리고 문 너머로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들이 들렸다. 아마도 전화로 통화했던 남자의 목소리 너머로 들렸던 대화소리의 그들인 듯했다. 문을 노크했지만 대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나는 501호로 생각되는 그 공간의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4명의 사람들이 원탁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전화하신 분?”
미처 보지 못한 문 옆 구석에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혼자 떨어져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난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탁으로 가서 앉았다.
“들어오세요. 그리고 우리에게 뭔가를 팔아봐야. 우리가 사고 싶게 만들어 봐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원탁에 앉은 5명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장난을 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멘 채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뭘 팔아야 하는지 막막했다.
“저, 혹시 제가 파리에 가서 직접 본 붉은시테테러 경험을 팔아봐도 될까요?”
전화를 받았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소피카의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붉은시테테러 현장에서 보았던 그곳에 장면들과 그곳에서 도망치며 심재연 교수를 만나 한국으로 돌아온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이야기를 마치자 전화를 받았던 남자는 원탁에 앉아 있던 나머지 4명에게 말했다.
“자, 이 이야기 사고 싶은 사람 손.”
그러자 그 남자를 포함하여 5명이 모두 손을 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가 손을 들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상황인 것 같았다.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습니다. 모두 박수.”
5명의 표정은 장난스러웠다. 뭔가 그들만의 의식이었는지 절차인지 혹은 장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환영이 싫지 않았다. 나도 친구라는 존재가 생길 것 같았다. 아주 보통의 존재, 하지만 나에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그 친구라는 것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B.E.S라는 이름의 철학 학회였다. ‘Blue Ears Society’의 줄임말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이런 이름을 만들었는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예전 석사, 박사 학위가 있던 시절에 사용되던 연구실이었는데 지금의 G1에서 G10까지의 학위 등급제가 만들어진 이후 연구실이 A동으로 이동하면서 심재연 지도교수의 학회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학회 이름은 연구실에 붙여져 있던 의미모를 심벌에서 따와서 지었고 심재연 교수는 이 학회에 사실 지도교수로 이름만 올라가 있을 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무슨 목적인지도 모르는 이 학회를 매일 학교에 오자마자 갔었다. 학회실에는 공강의 사람들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고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뉴스나 사회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답잖은 일상에 이야기였다. 김민미의 전화는 그 후로도 며칠간 쉬지 않고 이어졌지만 3일이 지나자 그 후로 전화가 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표가 똑같아 마주쳐야 당연했지만 내가 B.E.S를 찾아온 그날부터 그녀는 강의실에서도 볼 수 없었다. 나는 학회에서 동갑인 지유와 친해졌는데 지유는 3월에 학회에 들어왔다고 했다. 지유와 나는 학회의 유일한 G1 레벨이었다. 지유는 심재연 교수가 전화번호를 줬던 정우선배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그래서인지 이 학회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점심식사를 지유와 함께 자주 먹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지유와 점심을 먹으러 가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김민미 그녀가 어떤 아이와 걸어오고 있었다. 김민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개새끼.”
김민미 그녀는 나에게 이 한마디를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지나갔다. 이 모습을 보며 지유는 크게 웃었다.
“연가시가 새 숙주를 구했네.”
지유의 이 말이 김민미를 말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순간 수치심을 느꼈다. 나도 한때 그녀의 숙주였다는 것일까? 나는 김민미에 대해 지유에게 물었다.
“김민미에 대해 알고 있어?”
“알지. 나름 유명해. sobriety 멤버야. 나이도 모르고 본명도 모르는 연가시지. 난 니가 김민미와 다니는 걸 봤었어. 친구인척 다가와서는 sobriety로 데려가겠지.”
“sobriety가 뭐야?”
“아, 긴 얘긴 한데 우리 학회실이 예전에 심재연 교수의 연구실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사실 연구실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성회복운동본부라고 하여튼 그런 게 있었어. 인간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정책과 현상들을 비판하는 학회지를 출판하기도 했었고 아무튼 그래. 그랬는데 그 사람들 사이에서 학술파와 행동파가 나뉘었던 거야. 행동파 사람들이 주축인 대체신체 상업적 판매 반대 시위가 확산되면서 그때 인간성회복운동본부는 강제 해체되었어. 그 행동파 사람들이 sobriety가 된 거야.”
“그러면 B.E.S는 인간성회복운동본부의 학술파 사람들인 거야?”
“뭐래.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음... 그런가? 그렇다고 하기엔 이 학회사람들은 너무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아닌가? 학회지도 학회장형 혼자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제출하거든.”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고하고 갈등하며 점차 같은 색을 띠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온라인에서의 추천 알고리즘을 비판해 왔다. 취향과 선호를 넘어 사고를 지배해 온 추천 알고리즘은 비단 온라인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 자체가 소속을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이었다. 나는 이 알고리즘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친구 한 명 없이 살아왔던 나는 분명 철저히 집단지성에서 열외로 살았다. 하지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40년대 반유교운동에도 불구 사라지지 않은 유교적 사고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아마 김민미 그녀도 sobriety 알고리즘의 숙주일 뿐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녀가 원망스럽지도 않았고, sobriety에서 벗어난 내가 다행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모든 건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