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특히 개학은 나처럼 사회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례한 일정이었다. 1 대학에 입학한 학우들 중에서는 나와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친 사람이 많을 지도 모른다는 서툰 기대는 애초에 접어두었다. 신입생들 중에는 벌써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학생들이 보였고,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서 나에게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입학식 첫날은 수업이 없었다. 시간표를 짜야했지만 어떤 수업을 선택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제일 먼저 심재연 교수의 강의를 선택하고 멍하니 태블릿의 화면을 넘기고 있을 뿐이었다. 신입생들은 서로 모여 시간표를 같이 짜고 있었고 나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뒤를 지나가는 사람의 가방이나 코트가 부딪히는 건 줄 알았는데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봤다. 순간 파리에서 만났던 소피카가 생각날 만큼 큰 눈을 가진 여학우였다.
“도와줄까?”
“네, 부탁드립니다.”
나의 뒤에 앉아 있던 그녀는 비어 있는 나의 옆으로 와주었다. 같은 과 선배 몇 명이 강의 시간표를 짜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선배라고 생각했다.
“안녕, 난 51학번이긴 한데, 1학기를 조금 다니다가 휴학하고 이제 복학해서 너와 같은 학년이야. 난 시간표 다 짰는데 보여줄까?”
“고맙습니다.”
이미 서울 1 대학 인문학부를 다녀봤던 그녀의 시간표가 어쩌면 정답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나에게는 그랬다. 그녀는 나의 태블릿에 유일하게 등록되어 있는 심재연 교수의 강의를 보며 말했다.
“현대철학의 이해 하나만 등록했네? 철학과 전공을 할 생각인가?”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심재연 교수의 수업을 듣고 싶어서요.”
“심재연 교수를 알아? 심재연 교수 수업 인기 없는데... 아, 뭐 과제도 없고 딱히 수업준비 할 것도 없긴 하지만 학점 받기 어렵다던데... 뭐 나도 들어볼까? 같이 들을래?”
나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입학 첫날 나에게 같이 수업을 듣자고 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거절할 수 없이 다가온 그녀를 그 날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가끔 생각해 본다.
그녀의 이름은 김민미, 그녀는 초등학교를 1년 빨리 입학해서 나와는 동갑이었다. 우리는 친구처럼 편하게 말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친구처럼 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까닭은 그녀가 나의 친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학교와 선배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에 몇 개월 학교를 다녀봤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가 이 학교를 그녀 없이 1년을 다닌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을까 싶었다.
그녀는 항상 나와 붙어 있었다. 정확하게는 그녀는 항상 나를 데리고 다녔다. 여러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를 소개해줬고, 모든 수업을 우리는 함께 들었다. 대부분 수업의 중간고사, 기말고사 혹은 과제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서 수업시간이면 나의 팔을 툭툭 치며 ‘이 부분 집중해서 들어’라고 조언도 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공감하고 친해져야 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사회성과 공감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우리의 관계가 이상한지 조금도 우리는 친해지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과 같은 사이가 연장될 뿐이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질문을 했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소식들에 대한 나의 의견,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나의 의견 같은 것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녀의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아서였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는 전혀 그녀를 읽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히브리어로 출판된 책과 같았다. 그 책이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읽어낼 수 없는 책과 같았다. 손톱은 단정하고 옷은 항상 깨끗했다. 항상 학생식당에서 정식만을 먹었고 식탐도 없고, 먹고 싶은 메뉴가 없었다. 모든 옷과 가방에는 브랜드가 보이지 않았고, 볼펜을 쓰고 나면 항상 바로 파우치 속에 넣었다. 말을 더듬는 경우도 없고 말실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상한 부분이 하나도 없어 이상한 사람이었다. AI 사이보그가 있었다면 아마 그녀와 같이 행동했을까? 생각되기도 했다.
같은 과 다른 학우들이 보기에 항상 붙어 다니는 우리를 연인사이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둘 사이에서 어떠한 다정한 기운이 없다는 것은 알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오해조차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대화하는 사람이 김민미 그녀 한 명 밖에 없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오롯이 그녀에게 종속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