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져 있었다’라고 말했다. 종종 학회 계간지가 언론에 인용되었던 적이 있지만 <대체신체와 인간성 회복에 대한 고찰> 모임에서 발표된 평론들은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보도되었다. 일부 매체에서는 기조연설 중인 나의 사진을 인용하였다. B.E.S는 반(反)알터 조직으로 악의적으로 매도되었으며, 과거의 반 AI, 반 유교 주제의 평론들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소식은 학교에까지 전해졌으며 서울 1 대학 인문학부 소속의 학회였던 B.E.S는 학교의 지원이 중단될 예정이었다. 심재연 교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유는 B.E.S의 후원 계좌에 들어와 있는 금액을 보여주었다. 계간지 마지막에 적혀있는 유명무실한 후원 계좌에 실제로 후원금이 들어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매체에 반 알터 소식이 전해지자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후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기적인 행사를 진행하기에는 과분한 금액이었다. 지유와 나는 학교 소속 학회가 아닌 단체로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학회실이었던 4호관 501호는 오래전부터 지유와 나, 그리고 수석연구원들의 사무실이 되어버렸다. B.E.S소속의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유와 나는 학교 앞 건물 지하 4층에 단체를 위한 공간을 임대했다. 우리가 임대한 4층 공간에는 아무런 집기도 없었다. 그저 텅 빈 넓은 곳에서 지유와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지유에게 물었다.
“그러게...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지유는 대답도 아닌 되물음을 하였다. 우리에겐 지향점과 목표가 없었다. 우린 B.E.S에서 만난 동갑내기 동기였고, 그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투고하는 공간을 만들기 원했다. 그 방식이 하나의 플랫폼이 되었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리는 하나의 소리를 내는 플랫폼이 아니었지만 세상은 우리가 낸 소리 중 원하는 것만 들으려 했다. 그리고 그 플랫폼이 더 커지고 있었다. 우리는 G4를 마치고 둘 다 휴학을 했다. 더 이상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나는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었고 지유가 부회장을 맡았다. 지유가 소개한 새로운 사람이 사무처장이 되었고 수석연구원은 6명으로 늘어났다. 거의 나의 독단으로 정해졌던 월 정기 모임의 주제는 수석연구원들의 회의를 통해 선정되었으며 우리 단체의 연린 공간에선 비정기적인 모임이 생겼다. 나는 가능한 모든 모임에 참여하려고 했다. 새로운 단체의 이름은 <New Flux>였다. 지유와 나는 New Flux라는 물결을 만들었고 그것은 마치 생명이나 인격이 있는 것처럼 커져갔다.
New Flux의 조직은 비대해져 4개의 팀이 생겼다. 사무처에서는 언론대응과 회계를 맡았다. 운영팀에서는 정기 모임과 비정기 모임을 진행뿐만 아니라 회원 관리를 맡게 되었고, 출판팀에서는 광고 수주와 이제는 월간지로 변경된 평론지의 출판을 맡게 되었다. New Flux는 열린 공간과 모임에서 단체이자 매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다. 사회평론을 읽는 독자층은 너무 작아서 우리 단체의 성장도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건 성장도 영향력도 아니었다. 우리는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전하는 플랫폼이라는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2058년, 테러가 발생했다. 반알터테러였다. 서울의 여기저기서 화제가 발생했다. 알터가 운영하고 있는 상점과 알터가 경영하고 있는 회사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우리는 반알터테러에 대한 비정기 토론 모임을 오픈하였지만 정기 모임보다 많은 참석지원으로 수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는 정기모임을 열었던 홀을 급하게 예약하고 비정기모임을 개최하였다. 여러 사람이 차례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였다. 폭력과 독재의 결과론적 정당성 인정 사례 연구 및 최선의 결과를 위한 사회적 희생의 한계는 어디인가 등 다양한 평론이 발표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그녀를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김민미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