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은 미술인가 철학인가

철학만이 남아 버린 현대미술

by 구찬우

앞서 내가 생각하는 예술성이란 '시각화된 철학'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정의로는 부족해 보인다면, 아마도 철학을 무엇으로 정의하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선 검색포털에서 '철학'을 검색했을 때 가장 상위에 검색된 정의는 아래와 같다.


철학(哲學, 고대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은 세상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탐구, 판별하는 것이다.


세상에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비판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 역시 '대다수의 선택'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대 철학과에서 소개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일부를 가져와본다.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가장 근본적 문제들을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철학은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믿고 있는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추구합니다. 철학은 또한 각 분과 학문에서 전제하고 있는 기본 개념과 원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개별 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추구합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 3 문장을 가져왔는데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철학 / 우리 / 삶 / 비판적 / 검토 / 반성 / 추구 / 학문


짧은 3 문장에서 반복된 단어를 나열하면 결국


'철학은 우리 삶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반성을 추구하는 학문'


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내가 속해있는 컬렉터 모임에서 인기 작가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당연히 '철학'이라는 키워드가 나왔고,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철학 없이 그냥 그림 그리는 작가님은 없지 않나요?"


내가 대학생 때 A+를 받고도 한번 더 청강할 만큼 좋아했던 심의식 교수님은 철학의 시작을 '경의(驚義)'라고 하였다. 우리말로는 '놀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놀람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에 익숙해지지 않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놀람'은 결국 '왜'라는 의문을 만들고,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기회를 갖게 된다.


다시 누군가의 의문으로 돌아가보면, 철학이 없는 미술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산의 중앙동에서 남포동으로 이어지는 지하상가에 즐비한 갤러리는 해바라기 그림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서울에는 액자가게가 모여있는 삼각지 주변이 그러하다. 집이나 가게에 해바라기 그림을 걸어두면 재화가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그 해바라기 그림에는 아무런 철학이 없고 그런 그림을 그린 사람을 작가라고 하지 않는다.


지금은 유튜브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매우 호불호가 강했던 미술 유튜버가 있었다. 그 유튜버는 국내 대형 경매사의 출품 리스트 리뷰 콘텐츠를 종종 올렸는데 정말 웃었던 그의 말이 있었다.


"도대체 젊은 신진 작가들은 뭐가 도대체 낯설다는 건데요!"


그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많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 설명에서 '길을 걷다 느낀 낯섦'과 같은 표현이 너무 자주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대형 경매사의 위클리 온라인 경매 중에서 작가가 직접 출품할 수 있는 영역에서 볼 수 있으며, 사실 이 작가들 중 작품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신진 작가의 사례를 말한 이유는 바로 작가가 느낀 '낯섦'에 있다. 낯섦은 결국 놀람 즉, 경의이고 경의는 철학의 시작이다. 철학을 시작하는 자세이지 그것을 철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모든 작가가 자신만의 생각, 즉 철학이 있다고 해도 문제는 그 깊이에 있다. 신진작가 느낀 '낯선 장면, 낯선 느낌'의 그 찰나를 회화로 표현한다고 해서 자신의 감상을 타인이 공감하고, 더불어 예술성이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런 작품은 '시각화된 일기장'일 뿐이다.


그렇다면 미술계에서 작가로서 성공을 하려면 철학가가 되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볼 수 있다. 성공의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20년 이상 미술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면 정답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작품을 구하기 힘든 신진 작가들을 생각해 보자. 몇 작가들이 머릿속을 지나가는데 장담컨대 대부분은 10년 후에 지금의 세컨더리 시장가를 아니, 지금의 갤러리가 조차 방어하지 못할 거라 장담한다. 그들이 장악한 지금의 시장은 10년 후에 다른 신진작가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고 철학이 없는 그들의 작품을 더 이상 갈망할 컬렉터는 사라질 거라 생각한다.




철학의 깊이를 평가하고 증명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 역할이 미술 평론가의 역할이다. 미술 평론가 및 학예사가 작가를 철학과 미학적 언어를 증명해 주는 매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시 기획뿐만이 아니라 전시 서평, 도록 서문 그리고 미술사 정의 (도서, 전시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아니, 평론가가 뭐길래 그들이 평가하고 그들의 말을 믿어야 하냐라고 할 수 있지만, 평론가의 평론 또한 많은 미술계 시장에서 재평가 대상이 된다. 미술계의 사람들과 미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그 평론에 합의해 가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철학과 미학적 언어는 결국 인정받게 된다. 이런 과정을 이해하고 나면 미술이 더욱 재미있어진다. 이 과정을 이해하고 난 이후에서야 나는 무라카미 다카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과연 미술계가 합의한 평론을 정말 신뢰해도 될까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 내가 직접 만난 한 글로벌 유명 아티스트는 내가 학습한 그의 철학을 담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으로 보였다. 그 아티스트 뒤에는 함께하는 기획자가 있었는데, 실상은 기획자가 철학자이며 그 아티스트는 기획자의 철학을 시각화해 주는 수단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컬렉터들 중 그 기획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현대미술에서 주객이 전도된 철학만 남아도 되냐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그 철학이 얼마나 미학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는가에 대한 합의와 공감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왜 계속 '철학'과 함께 '미학적 언어'라는 표현을 반복했는지가 중요하다. 미술계가 미술가에게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가가 되어라는 강요를 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바라보고 인식하며 갈등하는 세상, 그리고 작가의 의견과 깨달음이 주제이고, 그것을 미학적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과정을 단순히 '철학'이라고 정의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우환 작가가 서울대 미대를 나온 것으로 대충 알고 있지만, 그는 서울대 동양화과를 3개월 밖에 다니지 않았다. 그는 니혼대 철학과를 수학하고 일본에서 미술 평론가로 먼저 유명해졌다. 작가가 철학을 전공했다면 사실 엄청난 까방권을 장착했다고 생각된다. 의심의 여지를 불식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미학이 부족했다면 지금의 이우환 작가가 있을 수 없다.


나는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미술계에 속해있지도 않다. 그저 미술이 좋아서 배우고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몇 년 전 리움 미술관에서 리처드 세라(미, 1938~2024)의 작품으로 처음 본 날이 생각난다. 거대한 구부려진 철판들 속에 들어가 도대체 예술이 뭔가, 이걸 예술이라고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의심을 했다. 예술이 시각화된 철학이라고 해도, 결국 하나의 언어와 같은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리처드 세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공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의 의심을 다시 의심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뭘 배웠는지, 뭘 말하고 싶은지, 다른 사람들은 그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사실 나는 아직 리처드 세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건 분명 내가 부족해서 이다.


KakaoTalk_20250510_164905322.jpg *사진 출처 : 리처드 세라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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