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팬 애니미즘을 글로벌 커먼센스로 만든 하야오와 무임승차한 카토
'용돈 받아 그림 사는 남자'라는 매거진을 기획하게 된 건 도쿄아트페어 방문을 했던 날이었다. 미술에 대한 너무 많은 생각들로 호텔 침대에 혼자 누워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차라리 이런 생각들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아이폰 메모장을 열어 토픽들을 쭉 적어 내려갔다. 마침 그때는 이미 장편소설 '나의 사랑하는 XX에게'의 집필이 끝난 상황이라 다음에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틈틈이 메모장에 적어둔 토픽들을 써갔고, 이미 그 토픽에 대한 글은 완고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 이후의 글들은 순서상의 맥락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앞으로 당분간 쓸 글들은 작가의 담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해 쓰려한다. 한 편의 칼럼으로는 부족한 내용이라 어떻게 나눠 써야 할지 부담이라, 오늘은 마침 곧 페로탕 서울 전시를 앞두고 있는 '이즈미 카토'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페로탕 서울 (PERROTIN SEOUL)에서는 '25.8/26~10.25 이즈미 카토(일본, 1969)의 전시가 열린다. 대한민국에서 운영 중인 갤러리가 9월 초에 기획한 전시는 그 해 가장 공을 많이 쓴 전시라고 봐야 한다. 프리즈&키아프가 이때 열리기 때문이고, 갤러리는 미술계에 가장 소개하고 싶은 전속 작가의 전시를 이 시기에 맞춰 준비한다.
컬렉터라면 이즈미 카토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저 얼굴을 한번 정도는 봤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괴물? 도깨비? 시각화된 Ego? 정도로 추정했었다. 그리고 많은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에서 계속 등장하는 저 얼굴의 정체뿐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더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즈미 카토의 작품은 SNS에서 회화작품 중심으로 소개가 되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 상당수는 조형 작품이다. 많은 조형작품은 아마도 가공되지 않은 돌에 얼굴을 채색한 작품이다. 왜 이즈미 카토는 돌과 목재에 괴랄한 혼령의 얼굴 같은 것을 그리는 가에 대해 가장 쉽게 '애니미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애니미즘(Animism)은 정령신앙으로 자연 모든 것에 령이 깃들어 있다는 원시 종교 혹은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를 소개하는 여러 글에서도 저 얼굴 (이하, 정령)이 어떤 정령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이제 '일본인 작가가 정령을 그린 것이구나'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이해를 쉽게 바꿀 수 있다. 앞선 글 '미술에서의 은유와 상징 https://brunch.co.kr/@goochanoo/85 '에서 미술에서의 은유와 상징은 이 중 최소 하나 이상에 해당되어야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ㄱ. 인문학적 가치, ㄴ. 철학적 가치, ㄷ. 미학적 가치 마지막으로 ㄹ. 작가의 인생과 합일되는 완벽한 서사라고 말했다. 이번 페로탕 서울의 이즈미 카토 전시 (김이순 미술사) 서문에서 이즈미 카토가 애니미즘 관점에서 정령과 바다와 관련된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인생과 합일되는 서사를 말하고 있는데, '그가 태어난 시마네현은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일본에서도 신토(神道)의 대표적 성소로 여겨지는 이즈모 타이샤(出雲大社)가 있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앞선 글에서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갤러리의 역할이 이런 것이다. 작가의 세계관/작품관을 세상에 소개하고 합의해 가는 과정에 있어 왜 이즈미 카토가 정령을 그려도 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내가 감히 홍익대학교 전, 교수인 그분의 서문에 대해 평가할 자격은 없지만 좋은 갤러리의 전시 서문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렇다면 재팬 애니미즘이라는 것을 내가 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예열시켰던 계기는 무얼까 떠올려본다. 그 시작은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히메 (원령공주)'이다. 모노노케히메에는 재앙신인 멧돼지와 사슴신 그리고 숲의 정령 고다마 외에도 수많은 신과 정령이 등장한다. 아마도 모노노케히메를 본 사람이라면 이질적일 수 있는 일본의 신관과 애니미즘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모노노케히메뿐만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재팬 애니미즘의 캐릭터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오물의 신, 가오나시가 유명하다.
아마 많은 나와 동시대 사람들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었다면 재팬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한 이즈미 카토의 작품을 공감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어쩌면 공감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이즈미 카토의 작품세계는 세계에 소개되기 힘들었을 것이며, 일본 미술계 안에서만 인정받고 소구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의 담론이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과정을 '사회적 합의'라는 표현 했는데, 담론은 담론일 뿐 미술계에서의 공감과 신뢰와는 별개의 과정이다.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애니메이션 감독 덕분에 재팬 애니미즘은 글로벌 커먼센스가 되었고, 이즈미 카토는 그 덕을 충분히 보았다. 하지만 단순히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예를 들어 나에게 있어 '아리랑'이라는 노래는 거의 눈물버튼에 가까운데, 외국인이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를 '알고 있다'라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운 것과 같은 원리이다. 나는 이즈미 카토의 작품 세계와 담론을 '대충 알고'있지만 '이해'한다고 까지는 말하기 어렵다.
이즈미 카토가 일본 미술계에서 다음 세대의 권좌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깔아준 주단을 무임승차한 것을 넘어 재팬 애니미즘을 커먼 센스가 아닌 글로벌 센스로도 공감할 수 있게 하냐는 과제가 남아 있다. 너무나 어려운 과제이지만 그가 이 난제를 해결해 간다면 나는 그 과정은 미술계의 갈라파고스인 한국미술의 세계화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미 충분히 멋진 작업을 해왔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즈미 카토를 응원한다.
* 페포탕 서울 이즈미 카토 전시 서문 : https://static.perrotin.com/presse_expo/press_release_11443_1.pdf?v=1755159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