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이후의 공백, 민중미술이 채우지 못한 자리
앞서 민중미술이 단색화 이후 한국 미술의 새로운 메인스트림이 되기 어렵다는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한국 미술계에서 ‘민중미술’은 단순히 '미술을 통해 사회에 발언하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는 '예술가들의 자각에서 비롯된 사회변혁운동'에 국한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1994년 전시〈민중미술 15년 : 1980-1994>에는 오윤을 비롯해 강요배, 권순철, 민정기, 방정아, 이만익, 임옥상, 황재형 등 총 24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 전시만 봐도 민중미술의 스펙트럼이 결코 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치균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의외다.)
결국 ‘단색화 이후의 넥스트 메인스트림으로서 민중미술’이라는 담론은, 이들 작가군에 대한 재평가의 흐름이 다가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주관적 판단으로 보자면 권순철, 오치균 정도는 이미 충분한 평가의 시간을 가졌고, 다른 작가들은 시장(갤러리·경매)에서 소개 기회가 적었다는 점에서 형평이 맞지 않는다.
‘오윤’을 중심으로 민중미술을 언급한 이유는, 그가 실제 시장에서 유통 가능한 유일한 민중미술 작가이기 때문이다. 즉, '예술을 통한 사회적 발언과 민주화 운동 참여'라는 본래의 정의에 부합하는 작가는 사실상 오윤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작가들은 민중미술이 아닌가?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작업은 오히려 ‘한국 리얼리즘 미술사’로 분류해야 된다고 본다. 민중미술이 리얼리즘을 포괄하기엔 양자의 간극이 너무 크다. 민중미술이 민주화 운동을 위한 사회적 촉구라면, 리얼리즘은 심미주의를 넘어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이다. 이는 1945년 한국전쟁 이후 꾸준히 이어져온 개념이다.
만약 리얼리즘을 민중미술의 하위 개념으로 본다면, 정영주 작가도 민중미술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정영주 작가는 리얼리즘의 연장선에서 미학적 언어의 한계를 돌파한 새로운 표현주의 작가로 생각한다.
아쉽게도 우리 대부분은 1940~60년대 리얼리즘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 역시 자국의 리얼리즘 운동에 무관심했다.
이와 관련해 내가 소장한 일본 작가 쿠마다 마사고(熊田満佐吾, 1910–1993)의 작품을 소개해보고 싶다. 비록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그가 작고 6년 전 그린 장미 정물화이지만, 그는 일본 리얼리즘의 시작점에 있는 작가이다.
그는 일본 리얼리즘 운동, 즉 생활도화운동의 선구자였다. 1941년 쿠마다와 동료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사건은 ‘생활도화사건(生活図画事件)’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양 화풍을 답습하던 미술계에서 그는 '지금 일본인의 현실과 삶을 그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 사회주의 서적이 문제 되어 투옥되었다. 나는 2017년 그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이 운동을 알게 되었고, 2019년 컬렉터 커뮤니티에서 한국 최초로 생활도화운동을 언급한 글을 썼다.
그의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연히 발견한 쿠마다 씨 후배 미술가의 온라인 일기를 통해 그의 말년의 삶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후배 화가의 일기에는 작고한 쿠마다 씨를 그리워하는 이야기와 그와의 만남과 술자리에 대한 기억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쿠마다 씨의 아네모네 정물화는 일품이었다'고도 적혀있었다. 그 할아버지의 일기는 몇 년 전 더 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았는데, 마지막 일기는 ‘결국 암이었다’라는 짧은 글만 남겨져 있었다.
이 사례를 드는 이유는, 일본처럼 큰 미술시장조차 리얼리즘을 주류로 만들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한국의 리얼리즘이 상업적 재조명을 받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앞선 글에서 나는 '가치와 시장은 다르다'라고 말했다. 민중미술이 상업적으로 확장되기 어려운 이유는 미학적 언어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얼리즘 작가 중 이 한계를 넘은 인물이 있다면 재조명은 가능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감나무 작가로 유명한 오치균 작가를 그 대표로 본다.
그는 가난했던 대학생활과 미국 유학시절 격은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의 개인적 서사도 풍부하지만, 한국에서의 리얼리즘을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하며 민중미술의 미학적 언어의 한계를 충분히 넘어선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민중미술이 품지 못한 ‘정서적 시선’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리얼리즘을 차기 메인스트림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단순하다.
재조명 가능한 작가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단색화 이후, 한국 미술계에서 아트마켓을 주도할 뚜렷한 사조는 아직 없다.
‘넥스트 메인스트림’은 아마도 지금의 신진 작가들 '사회와 기술, 감성과 인공지능의 경계에서 새로운 미학을 탐구하는 세대' 에게서 탄생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