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정신은 남지만, 시장은 물성을 거래한다
며칠 전, 컬렉터들의 단체 대화방에서 ‘단색화 이후의 민중미술이 한국 미술의 다음 메인스트림이 될 수 있을까’라는 주제가 오갔다. 나의 대답은 단호히 No였다. 그 이유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https://brunch.co.kr/@goochanoo/82) 앞선 글에서
브런치에 연재한 2058년을 배경으로 한 나의 소설 '사랑하는 나의 XX에게'의 1부 '사랑하는 나의 사하에게'에는「 AI의 예술 개입에 저항하는 예술가 집단 '뉴 레지스탕스 파'가 단색화 이후에 한국미술을 세계시장에 소개하게 되었다 」라는 내용이 있다. 내가 쓴 소설 보다 더 빨리 한국 미술이 세계로 확장되길 바란다.
나의 장편소설의 일부분을 차용하며 마무리했었는데, 단색화 이후에 한국미술이 세계시장에 소개된 시기를 나의 소설 속에서는 2058년 이후로 상정했다. 아직 한국 미술이 세계 시장에 진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한국 미술이 내 소설보다 더 빨리 세계로 확장되길 바라면서도, 현재 유통되고 있는 단색화 시장 말고는 그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한다.
단톡방에서 ‘민중미술’이 다음 메인스트림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는 일정 부분 공감했다. 나 역시 한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선 우리는 민중미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 역시 솔직히 말하면 ‘오윤’이라는 작가 외에는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름이 많지 않다. 검색해보니 오윤 작가가 부산 동래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같은 고향이라 괜히 친근함을 느꼈다.
하지만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에서 그의 작품 낙찰 사례를 찾아보면 검색되지 않는다. 과거 몇 차례 목판화가 출품된 기억이 있으나, 대부분 낮은 가격에 머물렀다. 이는 작품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제작 방식에 기인한 문제로, 당시 민중미술의 목판화에는 ‘에디션’ 개념이 철저하게 적용되지는 않았고, 진위 판단 또한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의 보존성·진위성·시장 유통 구조 모두가 불안정하다. 설령 미학적 가치나 역사적 중요성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이를 지속적으로 거래할 수요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립미술관 등에서 민중미술을 재조명하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 수요가 없었던 이유는 단순히 작품의 ‘아름다움’ 문제만은 아니다.
민중미술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메시지와 집단의 저항성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나 또한 대학 시절 교정의 벽에 그려진 대형 민중미술 벽화를 기억한다. 당시 스무 살의 눈에 그것은 원시적이면서도 투박하게 느껴졌다. 제한된 조색, 거친 선, 날카로운 구호의 타이포그래피는 일반적인 미술 언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즉, 민중미술은 ‘인문사회적 가치’ 면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이지만, 시각적 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하진 못했다. 시장이란 결국 ‘소통 가능한 언어’를 요구한다. 그 지점에서 민중미술은 여전히 난해하고 접근이 어렵다.
‘미술시장’이라는 단어에서 핵심은 ‘시장(market)’이다. 즉, 교환과 유통이 가능한 구조를 전제한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태생적으로 시장의 논리와 거리가 멀다. 대중적 소비보다는 저항과 기록의 역할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작품이 값싼 종이나 천 위에 제작되어 보존에 취약하며, 이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뮤지엄이나 갤러리의 독과 세력도 부재하다.
결국 작품의 물성·유통·보존 체계가 갖춰지지 않는 한, 민중미술은 시장 내에서 ‘다음 세대의 주류’로 자리 잡기 어렵다.
민중미술은 한국 현대사의 정신을 응축한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이다. 그러나 그 미학적 언어와 유통 구조는 시장의 언어와 다르다.
민중미술은 정신을 새겼지만, 시장은 정신이 아닌 물성을 거래한다.
그 간극이 메워지지 않는 한, 단색화 이후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 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 정신이 다시 새로운 형식으로 변주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미술이 세계로 확장될 다음 장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