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이 비워지는 건, 고통이 사라지는 일과 닮아 있었다.

by 이브 Eve

잊으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또렷하던 얼굴이 흐려지고,

목소리의 높낮이도 가늠되지 않았다.

기억의 형태가 점점 무너졌다.


억지로 떠올리려 할수록

더 멀어졌다.

시간은 기억을 닳게 만들고,

나는 그 마모에 익숙해졌다.


이름을 떠올리려 해도

입 안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그 공백 속에서 이상하게

편안함이 밀려온다.


이제는 잊지 않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기억이 비워지는 건,

고통이 사라지는 일과 닮아 있었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희미하다.

누가 나를 불러도,

그 이름이 내 것 같지 않다.


이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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