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맑았던 하루 그래서 더욱 기억이 선명한...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 인 것 같다. 아니 그때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쓰고 있을 1983년 어느 날 좋은 봄 날 이었다.
아버님께서 갑자기 화선지와 먹 그리고 물감을 마루에 꺼내 놓으시고 수묵화를 그릴 준비를 하고 계셨다. 처음보는 광경에 호기심이 난 나는 아버님 옆에 딱 붙어 구경을 시작했다. 역시 그림 그릴 먹을 벼루에 가는 일은 내 몫이 되었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하는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그림도 그릴 줄 아셨구나 하는 존경(?)의 마음으로 열심히 먹을 갈았다.
큰 나무 한 그루를 그리시고 그 나무 양 옆에 큰 바위가 비스듬히 나무에 기댄듯 아니 나무를 지탱하는 듯한 그림을 그리시고 나무 가지가지마다 가운데는 노란색으로 꽃잎은 주황색으로 색칠을 하셨다. 태어나서 11년동안 살면서 처음 보는 나무였기에 마냥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다 그리신 후 뿌듯해 하시면서 그리신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다. 그때 말씀해 주신 나무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양 옆에 바위가 나무를 곧고 크게 잘 자랄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부모를 뜻하고 그 부모님의 노력으로 큰 나무로 성장하고 예쁜 꽃도 활짝 피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어릴적 나에겐 아버님은 아주 큰 존재 였기에 아버님께서 처음 그리신 수묵화 역시 그 어떤 화가의 작품보다도 크고 멋지게 보였다.
며칠이 지난 뒤 마침 학교 미술시간에 수묵화를 그리게 되었다. 내 머리속에는 얼마 전 아버님께서 그리셨던 나무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수묵화를 그리시는 아버님 옆에 딱 붙어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봤던 나에겐 이미 머리 속에 새겨 넣은듯 또렷하게 기억이 남아있었다.
정말 열심히 순서에 맞추어 아버님께서 그리신 그림을 복사하듯 그려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그릴 주제도 그림도 아니었기에 그림을 보신 선생님도 어떻게 이런 나무를 그릴 생각을 했는지 의아해 했고 산, 집 동물 등 가장 기본적인 도형에 가까운 수묵화를 그리고 있는 다른 친구들보다 월등히 잘 그려 보였다.
순간 칭찬 받은 이 그림을 빨리 집에 가져가서 아버님께 자랑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버님이랑 똑같이 저도 그렸다고 그래서 칭찬 많이 받았다고...
방과 후 숨을 헐떡이며 집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더니 어머님께서 빨래를 하고 계셨다. 먼저 어머님께 보여드렸더니 어떻게 아버님 그림과 이렇게 똑같이 그렸냐며 놀라시며 잘 그렸다 칭찬하셨다.
나는 오는 식구들 순서대로 자랑하려 내가 그린 수목화를 잘 보이게 마루 끝 찬장에 걸어 놨다.
중학생이던 형이 마루에 올라서다 그림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한다. '어! 아버님이 또 그림을 그리셨네?' 나에겐 짧은 일생에 들은 최고의 찬사처럼 들렸다. 이제 나의 존경의 대상인 아버님의 칭찬만이 남았다. 언제 오시나 아버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길게만 느껴졌다.
드디어 아버님께서 들어오셨다. 순간 어머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당신이 그린 그림이 우리 막내가 그린 그림과 같다고...' 어린 나였기에 그 말씀이 나에겐 마냥 칭찬으로만 들렸다. 바로 내가 아버님만큼 그림을 잘 그렸다고 말이다.
그날 나는 아버님께 어떠한 칭찬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 단 한번도 아버님께서 수묵화 그리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늘 의문을 가졌다. 그때 왜 아버님은 나에게 칭찬 한마디를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서운한 마음도 함께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앞서 어머님의 말이 아버님께는 당신이 그리신 그림이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이라고 들렸겠구나 라는 생각을 30년이 훌쩍 지난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어머님 말씀에 맘이 몹시 상하셨구나 그리고 자존심이 무척 강하신 분이기에 어린 자식에게도 차마 칭찬 한 마디 하기 힘드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 서운함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아버님께서 막 시작하시고 도전하시던 수묵화란 취미 생활을 내가 막은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드는 지금....
두 분다 살아 계셨다면 다시 한번 옆에서 나는 먹을 갈고 있고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아버님, 그리고 그 모습을 즐겁게 웃으며 바라보실 어머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상상 만으로도 너무 나도 행복한 날 좋은 봄날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