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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의 힘 Nov 19. 2021

꿈꾸는 듯했던 2022학년도 수능영어

멀리서 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이들 사이에 딸이 보인다. 무표정이다. 아직까지 시험을 잘 쳤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딸에게 크게 손짓한다. 딸이 나를 알아보기가 무섭게 급히 다가가 안아준다.


"딸, 고생했어."


아빠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소 짓던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다. 그것도 서럽게. 뭔가 잘못됐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평소에 시험에 관해서는 대범한 모습을 보이던 딸이라 더 그렇다.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딸이 말한다.


"영어 듣기평가 시험 도중에 스피커가 고장났어. 나 풀지도 않고 찍은 문제도 있어."


영어시험에 찍은 문제가 있다니 정말 큰일이다.  


고3인 딸과 나는 한 팀이 되어 대입전형을 함께 준비해 왔다. 일찌감치 정시보다는 수시로 방향을 잡았다. 수시 원서 6장 중 수능최저가 있는 전형이 4곳. 수능점수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수능과 학교 내신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과학 두 과목에 부족한 시간을 쏟는 대신 국, 영, 수 위주로 승부를 보겠다는 수능 전략을 짰다.


특히, 영어에 강점이 있기 때문에 영어에서 무조건 1등급을 받고 상대적으로 부족한 국어와 수학에서 등급을 받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 딸은 영어 듣기평가 중간 짬짬이 독해문제를 풀며 시간 안배를 해왔다. 그런 식으로 고등학교 3년 내내 영어 모의고사에서 모든 문제를 다 풀고도 다시 한번 점검할 수 있었다. 물론 풀고도 틀린 문제는 있었으나 시간이 부족해 찍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던 딸이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수능 당일 영어시험에 문제를 보지도 못하고 찍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본인의 잘못이 아닌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다른 누군가 때문에.


꿈을 꾸는 거 같았어.

딸은 이렇게 표현했다. 듣기 평가 중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 순간을. 어디서도 들어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기에 이런 사태를 대비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기에 듣기평가 도중 짬짬이 독해문제를 푸는 전략도 물 건너갔다. 전략에 크게 차질이 생겼고 당황하여 시간에 쫓긴 나머지 결국 한 문제를 제대로 풀지도 못한 것이다. 물론 듣기평가가 재개되고 2분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전날, 입시장소가 하필 집과는 가장 먼 곳으로 배정되어 시무룩해했던 딸에게 좋게 생각하자고 말한 내가 미안해진다.


"역시, 세상에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닌가 봐."

딸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살다 보면, 내 잘못이 아닌데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아."라며 애써 딸을 다독거린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차를 돌려 학교에 가서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든다.


"아빠, 이제 시험 끝났으니 어쩌겠어? 기다려봐야지."


딸의 의연한 모습이 대견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중요한 날, 이렇게 중요한 시험에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그 누군가가 원망스럽다.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딸과 마음을 다잡고 돌아오는 주말에 예정된 면접 준비를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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