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화난 진짜 이유
화가 끝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내 안의 화를 잠재우지 못하고 팡 터트려버린 날이면 이것이야말로 가려져있던 나의 참모습인 것 같아 부끄럽다.
아이들에게 그토록 "아무리 화가 나고 짜증 나도 때리거나 물건을 던지면 안 돼." "그렇게 화난다고 소리 지르고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는 말을 해선 안 돼." 가르쳐놓고 정작 어른인 내가 지키지 못한다.
아이들은 어째서인지 내가 여유 없을 때, 지쳤을 때를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내가 화병 걸릴까 걱정되어 한 번씩 풀어주는 걸까. 유독 그런 날일수록 더 말을 안 듣고 사고를 친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샘~ 지금 5년간 다문화 학생수랑 국적 조사하는 국회의원 자료 제출 공문이 왔는데 오늘 1시까지 제출이에요. 최대한 빨리 부탁해요"
내가 정말 정말 싫어하는 자료조사 공문. (특히 국회의원 회의용 자료조사 공문은 그날 오전에 보내놓고 몇 시간 안에 당장 내놓으라 하니 극혐한다) 수업 준비 열심히 해 놨는데 부랴부랴 교사 참여가 적은 모둠활동이나 개인활동으로 전환하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얼른 보고 하고 공문 처리를 끝내 수업 진행을 해야 하니 마음이 급하다.
'왜 이딴 걸 조사하라고 난리야. 필요하면 미리미리 요청던가.'
"선생님~ A랑 B 싸워요!"
"선생님~ C 지금 슬라임 꺼내 노는데요?"
부글부글하던 화가 폭발한다.
"다들 조용히 해!!!! 선생님이 지금 뭐 하라 했어!"
다다다다다다 밀린 잔소리와 전혀 곱지 않은 말들을 따발총처럼 날린다. 며칠 전 도덕 시간에 감정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은데... 화를 쏟아붓고 난 뒤 내 눈치를 보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화는 화대로 내고 내 마음에 짐이 생기고 일처리도 못하고... 최악이다.
교사 생활 8년, 애엄마 생활 3년.
여러 차례의 반복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엄마가 화났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로 인해 화난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 '엄마가 화났다=지쳤다 내지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다른 이유 때문에 화가 이미 났었다 '이다. 단지 아이가 타깃이 되어 화의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미안한 일인가. 그래서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면 늘 찝찝하다. 등원시키고 난 후 혹은 재우고 난 후, 미안함에 하루 종일 아이 생각이 난다.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후회하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화냈던 날은 아이가 아닌 다른 무언가 때문에 내 마음이 이미 좋지 못할 때였다.
퇴근하고 나서 공동육아를 기대했는데 게임한다고 자꾸 사라지는 남편이 야속할 때, 너무 보듬고 키워서 애가 겁이 많다는 둥 너무 혼을 안내서 애가 짜증이 많다는 둥 시부모님의 육아 잔소리를 들을 날, 밤에 자꾸 깬 아이들 때문에 잠을 설쳐 피곤할 때,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아 주방 엉망으로 만들면서 새로운 메뉴 열심히 요리했는데 생각처럼 먹지 않아 실망한 날, 독박육아하며 정신이 하나도 없이 혼이 쏙 빠져있는 날, 약속 시간 늦을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한 날 등등...
모든 원인은 '아이' 라기보다는 '나'와 내 주변 다른 '환경'에 있었다. 남편에게 잔소리하자니 큰 싸움으로 번질까 봐 옆에서 어지르고 있던 아이를 나무라고 시부모님께 말대꾸할 용기가 없으니 울지 말고 말하라며 아이에게 윽박지른다.
아이 훈육할 때 비난과 협박형 말을 자주 내뱉는 남편에게 "오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고 그렇게 아는 체 해놓고서는 정작 나 역시도 화가 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비난과 협박이다. 아이가 어떤 말을 가장 무서워하고 상처받는지 제일 잘 아는 내가 결국 그 말을 가장 많이 내뱉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에게 화를 덜 내기 위해 내가 지쳤음을, 내가 여유 없음을 미리 알고자 노력한다.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도 그 이유다. 남편이나 어른들에 대한 섭섭함과 설움을 글로 진탕 풀어내다 보면 마음이 좀 나아진다. 때론 나아지진 않더라도 '아 나 요즘 마음상태 완전 엉망이네. 육아 번아웃 제대로 왔네.'하고 알게 되어 조심하게 된다. 그러면 남편한테도 이렇게 미리 경고장을 내미는 것이다.
"나 요즘 상당히 우울하니 알아서 조심해!"
"나 친구들 만날 거야. 연차 좀 써봐."
뭐 이런다고 화를 안내는 건 아니지만, 열 번 화낼 거 다섯 번으로 줄면 그야말로 큰 소득 아닌가.
매일 하는 아이들의 행동이 유난히 거슬릴 때, 아이의 징징거림과 울음이 유독 듣기 싫은 날. 요즘은 그런 날 정 듣기 싫으면 아이에게 말한다.
"그렇게 하니 엄마가 듣기 힘들어. 저 방에 가서 애착이불 안고 진정하고 와. 진정 다 되면 거실로 나와"
그러면 큰 애는 군소리 없이 울면서(거의 오열급) 방 안에 들어가 진정하면 알아서 나온다. 이마저도 안 되는 날에는 내가 자리를 피해버린다. 아이의 기억에 아주 오랫동안 자리 잡을 모진 말은 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랄까.
사실 오늘 이 글을 쓴 것은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기 때문이다. 화가 터질 것 같은 날. 며칠간 둘째의 잦은 깸과 첫째의 새벽 기상으로 잠이 부족하고 오늘은 남편 야근으로 독박육아 확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을 재우기 전까지 수많은 화 폭발 위험(?)이 있었다. 빈정거림이나 핀잔의 잔소리가 1도 없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장난감 정리 안 하고 뺀질거릴 때, 퍼즐 맞추다 잘 안된다고 울고불고 짜증 내며 오열할 때, 둘이서 치고박고 싸울 때... 참지 못하고 쓴소리를 한가득 내뱉었다.
비록 나의 예상대로(?) 화를 냈지만, 오늘 하루도 정말 노력했다. 노력한다는 게 어디냐. 오늘도 한수십 번 화낼 것 열 번 내외로 줄였다 생각하고 자체 만족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련다. 수고했다 나 자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