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육아는 나를 쌈닭으로 만들어

by 도토리

아이를 낳기 전의 나를 떠올려보면 누군가와 싸워본 적이 거의 없다. 누가 싫은 소리 해도 그저 속으로 끙하고 넘겨버리고 화가 난다 싶으면 그냥 입을 닫고 내 할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육아를 시작하고부터는 쌈닭이 되어버렸다.

남편과는 연애시절부터 첫째 돌 넘어까지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틈만 나면 팡 터진다. 오죽하면 '나에게 바라는 점이 뭐야?'라는 내 물음에 남편이 '욱하는 것 좀 줄여줬으면'이라 했겠는가.
사춘기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것인지 친정엄마와도 냉전의 시기가 몇 차례 있었다. 부끄럽지만 육아에 대한 엄마의 조그만 핀잔과 간섭에도 화르르 불처럼 화낸 적이 부지기수다. 서로 감정이 안 좋아지고 나니 엄마 역시도 갈수록 말이 세게 나가 작년 한 해 동안 정말 많이 부딪혔다.

요즘엔 가족뿐 아니라 밖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도 쌈닭이 되곤 한다. 최근에 두 번 정도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지나가다 만난 할머니와의 갈등이었다. 문화센터에 가는 날, 가는 길에 있는 연못의 잉어를 아이와 함께 구경하는 중이었다. 한 할머니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나와 아기를 보며 한참을 중얼거리신다. '아춥다병'에 걸린 할머니였다. 뭐 우리 동네에는 워낙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사시다 보니 가을 겨울에(심지어는 여름에도) 외출할 때마다 '아춥다병'에 걸린 어르신들을 많이 만난다. 워낙 많이 들어 '아춥다병'을 퇴치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는 터라 '네^^ 아기가 더위를 많이 타서요'라고 평소처럼 무난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오늘 만난 할머니는 2절을 넘어 앵콜을 외친 자는 아무도 없는데 3절, 4절, 5절... 까지 하는 게 아닌가. 계속 듣다 보니 기분이 상했다.
"아는 말도 몬해서 추워도 춥다카지도 몬하는데 애미라는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엄마가 무능하고 생각 없다는 듯 말하는 그 말에 빵 터져버렸다.
"제 자식은 제가 알아서 키울게요!!!"
가시는 뒷모습에다 대고 크게 소리 질렀다. 분은 안 풀리는데 또 이렇게 화나서 어르신한테 소리 지르는 내 모습도 낯설고... 한참 동안 심장이 쿵쾅거렸다.

두 번째는 놀이터에서 만난 5살짜리 아이와의 갈등이었다. 우리 아파트는 아이가 적어 놀이터에 언제, 어느 시간대에 가도 우리 가족뿐일 때가 많다. 그렇다 보니 가끔가다 다른 아이가 있으면 엄청 반갑다. 한 번만 만나도 그 아이를 기억하게 된다. 오늘 만난 아이도 지난번에도 한번 만난 적 있던 애였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그 아이는 우리 아이들이 타려는 놀이기구 앞에 와서 자꾸 훼방을 놓았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형 봐~ 저렇게 높게 올라가네 대단하다." "같이 시소 탈래?"하고 친근함을 표현했는데 그게 문제였던 걸까 자꾸 얼쩡거리며 방해하는 게 아닌가. 주지도 않을 젤리를 우리 애들 앞에서 흔들어 보여주며 약올리지를 않나, 미끄럼틀 타는 곳마다 우리가 내려가려고 하면 거꾸로 올라왔다. 처음엔 아이들 보고 위험하니까 형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자 했는데 이건 뭐 기다림이 끝도 없었다. 다른 미끄럼틀로 옮기면 잽싸게 거기로 와서 또 그 짓하고... 아이 엄마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휴대폰을 하거나 다른 엄마랑 수다 떠느라 관심이 없었다. 터널 미끄럼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가 내려가는데 올라오는 아이를 터널 중간지점에서 마주했다.
"얘 위험하니까 그만해. 너 그러니까 아기들이 못 타잖아." 꾹꾹 눌러 담은 화가 아이에게도 느껴졌는지 그 뒤부터는 우리 꽁무니만 쫓던 아이가 저만치 떨어져 논다. 사실 아이는 죄가 없다. 놀이터에 던져주고 방관하는 부모가 더 밉고 화날 뿐이다.

독박육아 퇴근을 한 후 남편에게 오늘 일들을 카톡으로 나눴다.
"나 육아하면서 쌈닭 된 거 같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 거보니 남편이 보기에도 그런가 보다.
"잘했어. 스트레스만 받지마랑."

그래, 서른 초반까지 인생을 화 안 내고 참아가며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화나면 화나는 대로 말하고 살아야겠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니까. 내 몸과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나는 기꺼이 쌈닭이 되겠다. 남편이 오늘 이 말한 것을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내가 가장 많이 싸울 대상은 아마 남편이지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엄마가 화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