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기 전의 나를 떠올려보면 누군가와 싸워본 적이 거의 없다. 누가 싫은 소리 해도 그저 속으로 끙하고 넘겨버리고 화가 난다 싶으면 그냥 입을 닫고 내 할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육아를 시작하고부터는 쌈닭이 되어버렸다.
남편과는 연애시절부터 첫째 돌 넘어까지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틈만 나면 팡 터진다. 오죽하면 '나에게 바라는 점이 뭐야?'라는 내 물음에 남편이 '욱하는 것 좀 줄여줬으면'이라 했겠는가.
사춘기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뒤늦게 사춘기가 온 것인지 친정엄마와도 냉전의 시기가 몇 차례 있었다. 부끄럽지만 육아에 대한 엄마의 조그만 핀잔과 간섭에도 화르르 불처럼 화낸 적이 부지기수다. 서로 감정이 안 좋아지고 나니 엄마 역시도 갈수록 말이 세게 나가 작년 한 해 동안 정말 많이 부딪혔다.
요즘엔 가족뿐 아니라 밖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도 쌈닭이 되곤 한다. 최근에 두 번 정도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지나가다 만난 할머니와의 갈등이었다. 문화센터에 가는 날, 가는 길에 있는 연못의 잉어를 아이와 함께 구경하는 중이었다. 한 할머니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나와 아기를 보며 한참을 중얼거리신다. '아춥다병'에 걸린 할머니였다. 뭐 우리 동네에는 워낙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사시다 보니 가을 겨울에(심지어는 여름에도) 외출할 때마다 '아춥다병'에 걸린 어르신들을 많이 만난다. 워낙 많이 들어 '아춥다병'을 퇴치하는 데는 이골이 나 있는 터라 '네^^ 아기가 더위를 많이 타서요'라고 평소처럼 무난하게 대응했다. 그런데 오늘 만난 할머니는 2절을 넘어 앵콜을 외친 자는 아무도 없는데 3절, 4절, 5절... 까지 하는 게 아닌가. 계속 듣다 보니 기분이 상했다.
"아는 말도 몬해서 추워도 춥다카지도 몬하는데 애미라는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엄마가 무능하고 생각 없다는 듯 말하는 그 말에 빵 터져버렸다.
"제 자식은 제가 알아서 키울게요!!!"
가시는 뒷모습에다 대고 크게 소리 질렀다. 분은 안 풀리는데 또 이렇게 화나서 어르신한테 소리 지르는 내 모습도 낯설고... 한참 동안 심장이 쿵쾅거렸다.
두 번째는 놀이터에서 만난 5살짜리 아이와의 갈등이었다. 우리 아파트는 아이가 적어 놀이터에 언제, 어느 시간대에 가도 우리 가족뿐일 때가 많다. 그렇다 보니 가끔가다 다른 아이가 있으면 엄청 반갑다. 한 번만 만나도 그 아이를 기억하게 된다. 오늘 만난 아이도 지난번에도 한번 만난 적 있던 애였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그 아이는 우리 아이들이 타려는 놀이기구 앞에 와서 자꾸 훼방을 놓았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형 봐~ 저렇게 높게 올라가네 대단하다." "같이 시소 탈래?"하고 친근함을 표현했는데 그게 문제였던 걸까 자꾸 얼쩡거리며 방해하는 게 아닌가. 주지도 않을 젤리를 우리 애들 앞에서 흔들어 보여주며 약올리지를 않나, 미끄럼틀 타는 곳마다 우리가 내려가려고 하면 거꾸로 올라왔다. 처음엔 아이들 보고 위험하니까 형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자 했는데 이건 뭐 기다림이 끝도 없었다. 다른 미끄럼틀로 옮기면 잽싸게 거기로 와서 또 그 짓하고... 아이 엄마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휴대폰을 하거나 다른 엄마랑 수다 떠느라 관심이 없었다. 터널 미끄럼틀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가 내려가는데 올라오는 아이를 터널 중간지점에서 마주했다.
"얘 위험하니까 그만해. 너 그러니까 아기들이 못 타잖아." 꾹꾹 눌러 담은 화가 아이에게도 느껴졌는지 그 뒤부터는 우리 꽁무니만 쫓던 아이가 저만치 떨어져 논다. 사실 아이는 죄가 없다. 놀이터에 던져주고 방관하는 부모가 더 밉고 화날 뿐이다.
독박육아 퇴근을 한 후 남편에게 오늘 일들을 카톡으로 나눴다.
"나 육아하면서 쌈닭 된 거 같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라는 말은 안 하는 거보니 남편이 보기에도 그런가 보다.
"잘했어. 스트레스만 받지마랑."
그래, 서른 초반까지 인생을 화 안 내고 참아가며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화나면 화나는 대로 말하고 살아야겠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니까. 내 몸과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나는 기꺼이 쌈닭이 되겠다. 남편이 오늘 이 말한 것을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내가 가장 많이 싸울 대상은 아마 남편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