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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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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니 Nov 09. 2019

수건 한 장, 우산 하나, 라디오가 불러오는 기억

2019년 3월 7일 어른일기


KBS2에서 방영하는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가끔 멍하니 볼 때가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어느새 내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아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내 안의 나쁜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보통은 그렇게 힐링하며 프로그램을 본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궁상맞게 화면 속 아이들에게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마냥 즐겁기만 했던 어린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기에, 내 어른 생활이 고단해서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단 생생한 영상으로 기록된 어린 시절의 모습을 훗날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그들의 미래가 좀 부럽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1988년에 태어난 나보다는 영상이나 사진을 매개로 더 쉽게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사진이나 영상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을 기록한 것들은 대부분이 일상을 담았다기보다는 특별했던 어떤 날을 기념한 쪽에 가깝다. 옛 사진을 살펴보면 소풍이나 운동회에서 찍은 것들이 유독 많다.


다행인 건 어린 시절의 좋았던 일상의 순간을 반복해 떠올리게 하는 몇몇 물건이 내게 있다는 것이다. 수건 한 장, 우산 하나, 라디오는 어렸던, 그리고 좋았던 그날들을 내 앞으로 불러오는 것들이다.


몇 살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 덕에 욕실에서 깨끗이 씻겨 나왔던 어린 나는 수건 한 장을 몸에 두른 채 추위에 맞서고 있었다. 몸에 맺힌 물방울이 날아가며 체온을 빼앗아간다는 과학 지식 한참 뒤에야 배웠기에 어렸던 나는 그때 목욕만 하고 나면 춥다며 엄마에게 칭얼댔었다. 그러면 엄마는 언제나 수건 한 장을 더 꺼내 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성껏 닦아주셨다. 이제는 샤워 후 맨몸으로 욕실을 나와도 추위에 버틸만 하고, 수건 한 장으로 몸을 두르기에는 몸이 몹시도 커졌지만 언제나 수건으로 몸을 닦을 때에는 언제나 그날의 따뜻했던 기억이 나를 찾는다.


우산 하나도 엄마와 관련된 따뜻한 기억을 내게 불러온다. 어렸을 때 엄마와 우산을 쓰면 언제나 난 엄마에게 몸을 밀착했다. 그러면 언제나 난 마음이 안정됐다. 내리는 비가 내 손과 팔, 다리를 적셔도 엄마의 온기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우산은 내 성장을 알려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엄마가 우산을 들었던 어렸을 때는 내게 엄마는 한없이 큰 존재였지만 내 키가 엄마의 키를 넘어선 이후에는 나는 엄마가 젖지 않도록 우산을 신경 써 드는 어엿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라디오는 지금의 내 나이 또래였던 아버지의 젊은 날을 추억하게 하는 존재다. 여전히 야구를 즐겨 보시는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엔 담뱃갑보다 작은 미니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들으셨다. 귀 한쪽에 이어폰을 꼽고 집중하는 젊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난 마냥 신기해했다. 이어폰 하나를 뺏어 함께 들으며 이글스를 응원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미니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는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운전하다가 차에서, 스마트폰 앱으로 라디오를 들을 때는 야구 중계를 함께 들었던 어렸던 나, 젊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새 것이 넘쳐나고 과거는 잊히기 쉬운 요즘이지만, 좋았던 추억을 잊지 않게 해주는, 그리고 내 앞에 그 추억을 소환해주는 존재들이 한없이 고맙다. 연말 태어날 우리 아기에게도 이런 존재들이 한없이 많기를 소망한다. / 2019년 3월 7일 어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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