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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니 Nov 05. 2019

내 몸, 내 얼굴에 대한 책임

2019년 11월 4일 어른일기

에곤 실레의 네 그루 나무

며칠 전 뒷목부터 등 전체가 뻣뻣해지 강한 통증이 오는 바람에 정형외과에 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너무 멀쩡해서 정말 아팠던 게 맞나 헷갈릴 지경이지만 적어도 당시 느낀 통증은 내역대급 수준이었다.


아픈 이유는 모른 채넘어갔다. 잠을 잘못 자서인지, 통근버스 놓칠까 봐 평소 하지 않는 엎드려 머리 감기를 한 번 해인지 잘 모르겠다. 원인불명이었지만 결괏값인 고통은 지나치게 다. 참을성 좋은 편인 나는 '나아지겠지' 하며 파스 붙이고 맨소래담 바르며 며칠을 버텼지만 일주일 넘게 쿡쿡 찌르는 통증이 이어지자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픈 통증만큼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병원으로 향했다. 접수를 하니 으레 정형외과에 가면 한 번씩 찍는 엑스레이 촬영이 나를 기다렸다. 엑스레이 촬영 후에는 의사와의 상담까지 조금 시간이 있어서 나는 멀쩡했던 디스크가 터졌나, 뼈에 금이 간 것은 아닌가 나홀로 상상의 나래를 칠 수 있었다.


"엑스레이 상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요." 의사는 너의 고통에 내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정형외과를 들르는 일이 드물었지만 이렇게 방문할 때는 언제나 아픈 이유에 대해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역시는 역시,라며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디스크가 터졌네요' 따위의 설명이었다면 명쾌하고 이해하기 수월했을 텐데. 하지만 별 문제가 없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명쾌한 답을 못 줘서였을까. 의사는 더욱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엑스레이에 적나라하게 찍힌 내 뼈와 그 주변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척추랑 골반 뼈가 그렇게 휘거나 기울지는 않어요. 보통은 휜 경우가 많거든요. 대신 환자분 목은 뼈가 S자여야 하는데 일자로 굽네요.(쉽게 쓰면 거북목이라는 말!) 어깨는 오른쪽이 낮고 왼쪽이 올라오셔서 비대칭이고요. 업무 때 되도록 바른 자세하시고 스트레칭과 운동 적절히 하시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와의 짧은 면담 후에는 역시나 물리치료 순서였다. 멍하니 누워 물리치료를 받고 있자니 갑자기 이 생각 저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검은 바탕에 하얗게 찍혀 있던 내 뼈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들이 30여 년 짧지 않은 내 삶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흔적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왠지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몇몇 굽은 뼈들은 마치 내가 살아온 방식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발하는 것처럼 보였.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때로는 잘못도, 실수도 저질러 온 것이 사실이어서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꽤 바르게 삶을 살아왔다고도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어서 민망했다.


그럼 이제라도 오른쪽 어깨를 올리고 다니면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살면 다시 S자가 될 수 있으려나, 그리고 앞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면 내 지난 삶도 똑바로 바로잡을 수 있을까. 별별 생각이 마저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끝에 나는 뭐 별 수 없지 않겠냐고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만들어 온 몸인데, 바꿀 수 없다 하더라도 내가 책임지며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지난해 퇴사 직후 만난 한 사회 선배가 해준 말이 문득 기억났다. 그는 내 첫 퇴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상빈씨, 마흔 살쯤 되면 본인 얼굴에 대한 책임은 자신한테 있는 거야. 스무 살까지는 부모님 핑계 댈 수 있어도 마흔 살쯤 되면 자기 인생 어떻게 살아왔냐에 따라서 인상이 결정돼. 닮은 사람도 나중엔 얼굴이 달라진다니까"라고 말했다.


퇴사 전 6년가량을 기자로 일했던 나는 수없많은 사람들(주로 나보다는 나이가 많은 인생 선배들)을 만나면서 잘생김과 추함 여부와 상관없이 여러 좋은 얼굴을 마주했다. 나도 저런 좋은 인상을 가지며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몇몇 어른을 만났다. 물론 반대의 경우, 절대로 닮고 싶지 않은 나쁜 인상의 사람들도 수두룩 만났다. 두 부류의 얼굴은 주름이나 눈빛, 입매 등 사소하지만 작은 것들에서 미묘하게 차이가 났고 결국 전체적인 인상이 크게 엇갈 보였다. 사소한 것들이 결국 쌓여 좋음과 나쁨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자주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얼굴, 저런 얼굴에 대해 한참 말하며 언제까지나 좋은 얼굴을 가지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퇴사 직전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나는 내 얼굴이 이전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다며 우울하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30대 초반인 내게 "아직까지는 상빈씨 인상이 괜찮은데,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럴 수도, 안 그럴 수도 있지. 좋든 나쁘든 다 본인 책임이니 지금부터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봐"라고 얘기했다.


좋은 몸과 좋은 얼굴을 갖고 싶다는 바람이 조금 웃기고 어색하기도 하지만 언젠가 다시 내가 살아온 기록과 내 삶의 결과를 엑스레이나 거울 또는 다른 무엇을 통해 문득 확인하게 될 때 '나름 잘 살아왔네'라고 만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2019년 11월 4일 어른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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