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통지서를 보고 추억여행이나 할까 했는데, 웬걸!
가을이 바삐 지나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조금의 추위도 견디지 못하는 나에게 겨울은 아무래도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사무실 발 난로는 이미 가동한 지 꽤 되었고, 캠핑은 진작 시즌 오프했다. 요즘처럼 슬슬 숏패딩에서 롱패딩으로 갈아탈 때즈음이 되면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김없이 그날이 왔구나.’
"내일이 수능이네"
나는 매해 수능날이면 한해 한해 얼마나 따뜻해지고 있는지를 가늠해본다. 내가 수능을 봤던 그해 그날 밤의 온도를 떠올리며 지금 무엇을 입고 있는지, 얼만큼 추위를 체감하고 있는지를 비교해보면 매우 수월하게 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다. 그만큼 내 기억 속 수능은 '더럽게 추웠던 날'로 점철되어 있다.
그날 아침, 일주일 전부터 고심하고 또 고심해 고른 (혹여 졸릴까봐) 얇은 옷들을 여러 겹 껴입고 갔는데, 발이 너무 시려운 거다. 그래서 양말을 하나 더 신고 올걸 (이미 2개 신었음) 내내 후회를 했다. 엄마가 따끈하게 데워 담아준 된장국도 밥때가 되어 들이켜보니 내 발처럼 미적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그 당시 교실에 설치되어 있던 난로는 오직 머리 데피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험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남아 있는 게 없다. 수학 문제는 앞에 3문제 정도밖에 못 풀었다는 것과 영어 지문이 어려워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 마지막 시험이었던 선택과목인 일본어가 엄청 쉬웠다는 것 정도. 솔직히 시험에 목숨을 걸 만큼 19년 동안 열심도 아니었다. 그래서 기억이 밍숭맹숭한 거겠지. (이후 나는 100% 실기시험(작문)을 치뤄 극작과에 입학한다)
그렇게 시험을 잘(?) 마치고 학교를 나서는데, 학교 앞은 학부모들의 차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나는 유독 날이 너무나 새까맣다는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가 진 겨울의 오후는 칠흙같이 어두웠고, 흡사 시베리아에서 직빵으로 불어오는 듯한 영하의 바람은 19년간 준비한 시험이 끝났다는 이상야릇한 감상에 찬물을 쫘악쫘악 끼얹었다. 긴장으로 젖어있던 속옷에 찬바람이 스멀스멀 기어들어가서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뼛속까지 추워 어금니가 탁탁 맞부딪히는 리듬이 점점 나노 단위로 박자가 쪼개지고 있었다. 오돌오돌. 덜덜. 으슬으슬.
결국 지척인 집까지 친구 아버지의 차를 얻어타고 왔다.
유독 그해 겨울은 추웠던 기억이다. 어쩌면 '검은 롱패딩'이라는 획기적인 방한 아이템이 없어 맨몸으로 다녀서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성인이 되었다는 것에 우쭐해 한 겨울에 힐에, 치미에, 청자켓에... 합격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얼을 전기장판 속에 넣어두고 미친년 널뛰듯이 돌아다녔으니 그렇게 기억할 만도 하다. (추워서 친구들에게 틈만 나면 ATM 기기가 있는 은행 건물에 들어가서 몸 좀 녹이자고 했다. 그러다가 문이 닫혀 갇힌 적도 있다. 물론 다시 바로 문이 열렸지만)
그래서 11월 15일즈음이면 엄청 춥다라는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꽈악 박혀버렸는데, 어느 해엔가 내가 패딩이 아닌 트랜치코트를 걸치고 있는 게 아닌가. 문득 그런 자각이 들자 까무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게 바로 기후 변화의 직격탄이로구나..." 하며. 라떼는 언 발에 오줌이라고 누고 싶을 정도로 진짜 엄동설한이었다고!
겨울은 정말, 진짜, 참말로, 매우 진실되게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다. 추위라면 치를 떠는 나이지만 이 따뜻한 겨울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를 생각하면 주섬주섬 가방에 텀블러를 챙기게 된다. 이러다가 수능 때 맨투맨 하나만 걸치고 가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무섭다. 본격 추위=수능, 오랫동안 유지해온 나의 공식이 깨지게 된다면, 수능날 옷 따뜻하게 입고 가라는 당부도, 정문 앞에서 따뜻한 차를 나눠주던 정취도 사라지게 되겠지. 그리고 내 말은 다 '라떼~'가 되겠지.
과거의 사실들이
사라진 역사가 되는 일이
무수히 많아진다.
현재 지구는, 라떼꼰대 무한 양상 중!
"라떼는 겨울에 눈 왔어."
"라떼는 가을이란 게 있었어."
"라떼는 여름 태풍에 서핑 탔어."
"라떼는 벚꽃이 4월에 폈어."
"라떼는 수능날 겁나 추웠어."
"라떼는~"
세대의 변화가 점점 빨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지구가 들썩이는 것까지 느껴지니,
이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이렇게 올 11월 중순에도 지구에게도 수명이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만다. 옛날 앨범을 뒤적이다가 대학 합격통지서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적기 시작한 글이 이렇게 흐르다니. 역시 텀블러를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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