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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사만화 Nov 13. 2020

이별 후유증과 카레

나는 밤마다 카레를 만들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애달프려나. 얼마 전 <열세 살의 여름>이라는 책을 보고 유년기의 감정들이 떠올라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날서게 행동하고,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쑥스럽게 졸업을 맞이했던 그 시절의 나. 못나고 달뜬 철없는 소녀.



그제, 새삼 그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 이사 오고 한 번도 뜯은 적이 없는 낡은 판도라의 상자를 개봉했다. 테이프로 봉인된 채 몇몇의 집을 전전했던 나의 기록들. 박스를 뜯자 어린시절부터 대학 재학 시절까지 추억이 빼곡히 담긴, 낡고 바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먼저 손이 간 것은 구남친이 건넸던 사진첩이었다. 함께 대관령을 올랐던 한 여름의 사진들이 꾸깃꾸깃 담겨 있었다. 뾰루지가 난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 사진 한 장만 남겨두자 하고, 박스에 넣었던 게 생각이 났다.


소중했던 사람과 시간이, 이제는 그저그런 종이 쪼가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무수한 밤들이 무색하게 떠오른다. 손에 남아 있던 그의 향수 냄새,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종로의 거리, 그가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매실 엑기스, 그리고 손수 보정을 해서 인화해 온 사진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내 사진을 앨범에서 꺼내 쓰레기통으로 옮겼다.



처음 이별을 경험했을 때 상실감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새벽에 택시 타고 나가 그의 집 앞에서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마주칠까 기다리기도 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 닫힌 그의 공사 현장 앞에서 서성이기도 했었다. 상실을 감당하지 못해 나는 미련이라는 감정을 오랫동안 붙들고 버텼다.


어느 날 밤부터 카레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르고 썰고 볶고 끓이다 보면 어느 새 요란했던 감정들이 침잠되었다. 이렇듯 손으로 하는 일은 회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렇게 보글보글 끓는 카레를 보다 잠들고, 또 다시 괴로움이 찾아오면 다시 카레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레가 만들어지기 싫어졌을 때즈음, 그냥 잊혀지는 것도 그런 대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야채를 사 모으지 않게 되었고, 함께 살았던 친오빠도 마침내 카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가끔 참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에 차오르면 나는 요리를 한다.


순간의 망각.

위로는 언제고 따뜻한 것에 있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그 외에도 잊고 살았던 것들이 가득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썼던 소설, 대학 합격 통지서, 좋아했던 시 구절, 이제는 소식도 알 수 없는 친구들과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 술 처먹고 뻗은 대학 시절 엠티 사진까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 얼굴은 예쁘지는 않지만, 한 가득 앳되어 보여 조금 사랑스러워 뵌다.


'왜 옛날에는 마냥 못생겼다고 생각했을까. 제법 귀여운데.'


사진 속의 얼굴에는 괴로움이란 없어 보였다. 이상하다. 늘 우울했던 아이였던 것 같은데.


나는 빨간 잠바를 멋지게 차려입고 수련회에 가 있는 내가, 교복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를 껴입고 운동장에 누워 있는 내가, 단짝 친구들과 얼굴 구겨지도록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내가, 되도록 구김 하나 없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앨범을 덮었다.


겨울은 참 이상하다.

그리고 감기는 참 재밌는 녀석이다.

집 안에서 로브를 걸치고 유령처럼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지난 시간을 반추하게 만들었으니. 추운 거라면 기겁을 하는 나이지만 겨울의 풍경은 어딘지 사람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단호박 스프를 보니 모든 시간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https://youtu.be/YHAkXSlzb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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