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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사만화 Nov 24. 2020

아프지 않다고 행복한 건 아니잖아

암과 우울증, 무엇보다 박지선 씨를 추모하며


강아지 산책을 한창 하던 중에 캐나다에 사는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카톡 창에는 별다른 얘기 없이 이름 석 자가 써있었다.


[박지선]

[헐...]


직감적으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종일 정신없이 일하느라 인터넷 한번 들락날락하지 못했던 나는 무슨 일이가 싶어 퉁퉁한 털장갑을 벗고 네이버에 접속했다. 부디 아니길 바랐는데 야속한 단어가 그녀의 이름 앞에 달려 있었다.


[부고]


죽음의 변을 추측하는 수많은 기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인터넷을 뒤덮은 상태였다. 한 신문사에서는 공개를 원치 않는다는 유족의 바람을 무시하고 어머니의 메모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릇된 윤리의식 뒤에 도사리고 있던 사악한 호기심이 그녀의 행적, 말 한마디를 추잡하게 조합하고 있었다.


선하게 살았던 그녀를 추모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 현란한 키보드쇼 뒤에서 울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하나둘 방송을 중단했고, 여성 개그우먼들이 떠난 빈자리를 지켜보며 우리는 일주일가량을 함께 애도했다.







나는 유튜브를 하고 있다. 유튜브는 언젠가 직장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재발한다면, 혹은 내가 실직한다면,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 상황이 된다면, 내가 물러나야 밑에 후배가 올라가는 상황이 된다면, 나는 언젠가부터 이 미래가 너무나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오지 않을 거라고 자위하기에는 예정된 미래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무언가라도 해보자,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해보니 나중에 수입 창출해도 커피값 정도 벌 거 같아요 ㅋㅋㅋ)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떠난다면 나의 빈 자리를 누군가가 맘껏 그리워할 수 있도록 꺼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어렸을 때, 아주 잠시 할머니 손에서 자랐던 나는 할머니가 떠나고 오래도록 할머니가 그리웠다. 하지만 몇 장의 사진 외에는 그녀를 회상할 수 있는 방법은 묘연했다. 그래서 혹시 내가 우리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너무 아프지 않게 하루하루 쌓아올린 나의 일상들, 생각들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애도하다, 하다 어느 날 아침에 띵 하고 머리를 맑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웃으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내 쿠세들을 보며 놀리라고. 대부분의 암환자들이 유튜브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을 거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서.


박지선 씨는 나보다 훨씬 많은 곱절의 추억을 남겨두고 떠났다. 하물며 그 기록들은 그녀가 얼마나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종적들이라, 더 숙연해진다.


떠나고 나면 좋은 것만 남는다지만

그녀는 그냥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다. 6개월에 한번씩 검진을 하는 큰 병과 일상을 망가뜨리는 잔진바리 병, 비염이 그것이다.


암 때문에 죽고 싶은 적은 한번도 없다. 도리어 절절하게 살고 싶게 만드는 나의 자극 스위치다. 하지만 비염은 얘기가 다르다. 머리가 뽀개지는 두통에 시달리다가 참다 못해 약을 먹으면 찾아오는 무기력.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통증에 두 손과 두 발이 묶인듯한 구속감.


이 병 때문에 나는 죽고 싶었다.


박지선 씨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병은 일상을 망가뜨리는 병이었다. 그 병이 그녀의 일상을 볼모로 그녀의 마음을 얼마나 쑥대밭으로 만들어놨을지 가만 생각해본다.


이다울 작가가 쓴 <천장의 무늬>라는 책이 있다.


훌라후프로 낯선 동네 대회에서 뻔뻔하게 1등을 차지하고, 씨름판에서 두 배 몸집의 아이를 넘겨 젖히고,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는 담임선생님에게 ‘기물 파손’이라고 말하는 소녀였던 이다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통증이 찾아온다. 양치를 할 때 턱이 벌어지지 않고, 이불을 털다가 신발을 신다가 병뚜껑을 열다가 온몸에 쥐가 나고, 걸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어진다.

누인 몸을 겨우 일으켜 온갖 병원을 다녀 봐도 병명을 찾지 못한다. 그때 가장 간절한 것은 바로 그 병명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 책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했던 불안과 걱정, 통증에 대한 기록이다. (<천장의 무늬> 보도자료 중에서 발췌)


어떤 압도적인 슬픔 앞에서,
어떤 압도적인 죄책감 앞에서
위로의 말은 부서진다.
눈물은 갈피를 찾지 못한다.
- <천장의 무늬> 본문 중


하지만 그녀는 침대 위에서 아픔과 무관한 상상하고 글을 쓰고 우울이라는 토대 위에 자신만의 기발한 성을 세워냈다. 침대에 누워 낭독회와 전시회를 상상하는 일은 통증이 불러오는 식욕의 부재와 우울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구분들이 생활을 바꾸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켰다.


그녀는 살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 침대가 늪으로 잠기는 듯한

숱한 무력감에 맞서고,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숱한 계획들을 얼마나 세웠을까.


작지만 단단하고 강한 여인의 용기에 우주적 기운의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삶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통증을 이겨내는 일은 보통 낙관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물며 햇빛은...



이제 고통의 삶은 끝났다.

하와이에서 태닝하며

샴페인을 마시며

농을 치고 있을

지선 씨의 모습을 그려보며

이 글을 접는다.



“알로하! 지선 언니!”


그곳에선 행복하세요.

좋은 사람.







* 여러분, 모두 행복하세요.

혹 아파서 괴로우시다면 생각해보세요.

아프지 않다고 다 행복했던 것도 아니잖아요.






출판사 편집자로 종종 글을 쓰고 왕왕 영상을 만듭니다.

https://youtu.be/9HKGbs6dM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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