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은 나름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한 국가에서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실제로 보면 여러 가지 언어가 한 국가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한 국가에 공용어(official language)가 두 개 이상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스위스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가 공용어이긴 하나, 로망슈어와 표준 독일어도 교육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캐나다도 영어와 프랑스어 두 가지 언어가 공용어이다. 인도의 경우 공용어는 힌디어와 영어이나, 교육기관이나 관공서 등 제도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언어만 44개이며, 가정이나 지역 단위 공동체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248개에 달한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고의 범위를 규정한다. 그래서 한 국가에서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고방식과 사고의 범위가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다른 문화를 접하도록 하여 인간의 사고를 넓히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언어가 먼저인가 사고가 먼저인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언어와 사고가 완전히 동일하다는 주장이 있는 한편, 언어와 사고가 근본적으로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개인의 인지 발달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인지와 지식의 구조를 환경에 변형시킨다는 주장과 그렇지만 언어가 우선이든 사고가 우선이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낱말’이라는 공적 기호를 사용한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러한 공적 기호인 낱말의 연속적인 조합을 통해 개인의 생각을 공식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절대적으로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언어와 어떤 관념 간에는 자연적인 연관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부과된 의미가 존재하고, 언어라는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닮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의미는 선택이나 약정에 의해서 고정된다. 프랑스 사람과 영국 사람이 ‘인간’에 관한 관념은 동일하게 가지고 있으나 기호는 ‘homme’와 ‘man’으로 각각 다른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래서 교리라는 말은 우리는 ‘교리’로, 미국은 ‘doctrine’이라고 붙여 놓은 것일 뿐이며, 사실 우리가 지칭하는 ‘교리’와 미국에서 인식하는 ‘doctrine’이 같은 의미를 가질 이유도 없다.
번역 또는 해석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번역이냐 해석이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언어를 바꿔서 설명하는 것은 완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언어는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A라는 언어에는 포함되어 있는 단어가 B라는 언어에는 없을 수 있고, A라는 언어에서 표현하는 다양성이 B언어에서는 구현되지 않을 수 있다. 영어와 한국어를 비교해 봐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두 집단이 무기를 가지고 벌이는 무력 행위를 한국어로는 ‘전투’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로는 ‘battle’, ‘engagement’, ‘fighting’, ‘combat’등의 다양하게 표현한다. 영어가 다양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우리말로도 다양하게 표현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그렇게 구분을 해야 할 필요성이 없다면 굳이 영어와 같이 세부적인 구분은 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 문제없다. 서구인들의 경우 분석적이고 원인과 결과, 목적과 수단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동양인보다 분석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으로 여겨지긴 한다. 실용주의적 사유, 현실주의적 사유는 원칙을 존중하는 사유와 과정이 중요하다. 서양에 비해 초논리적 사유를 통해 단숨에 과정을 건너뛰려는 동양의 사상적 특징도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언어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를 가져오며, 따라서 언어가 다르면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고, 다르게 개념화한다. 그래서 언어의 상대성으로 인해 동일한 사물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누이트어가 눈(雪)에 관해 매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나, 사막에서 낙타에 관한 단어가 매우 많다는 것은 언어의 상대성이 확실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리를 만들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번역된 교리는 우리의 교리가 아니다. 번역으로 그치지 말고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다시 써 내려가야 우리의 교리가 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언어에 의한 인식의 차이는 심대하고, 언어는 그 사회, 그 국가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