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절벽에 있나? 매달려 있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거리의 철학자라고 하는 강신주 박사의 책이다. 강신주 박사는 학부 때 공학을 전공했으나 석박사를 동양철학으로 취득한 특이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해마다 책을 출간하면서 철학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강연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이 책은 무문관(無門關, gateless gate)이라는 선불교의 선문답을 작가 나름대로 해석한 책으로, 불교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읽겠다고 골라도 안 읽힐 수 있고, 우연히 잡은 책이 잘 읽힐 수도 있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책은 어쩌면 사람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연으로 골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책을 읽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이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작가는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여서 쓰게 됐다고 한다. 한 주에 주제 하나씩 1년에 걸쳐 48개 주제를 나름대로 검토했다고 한다. 이 책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평소 생각했던 내용을 밀도 있게 담아내려 노력했다는 걸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 글은 생각에서 나오니 글을 쓰는 이유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라고 일반화해도 크게 문제 되지는 않을 것 같다. 파스칼이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이 많이 휘둘리는 존재임을 말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널뛰기도 해서 한없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생각은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생각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생각 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석가모니께 대중들이 법을 청하자 그가 아무 말없이 꽃을 들어 보였다는 일화가 있다. 석가모니의 이런 행동에 대해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 제자 중에 가섭이 유일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일화는 일견 뜬금없고 맥락도 없다. 강신주 작가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 일화가 생각에 사로잡힌 보통 사람들의 습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중들은 석가모니의 위상을 생각하고, 석가모니가 왜 꽃을 들었을까를 생각했지만, 가섭은 꽃의 아름다움을 봤기 때문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권위와 모양에 흔들리는 우리의 모습을 인식하게 하는 말이다.
작가는 관념이 아니라 실체를 보라고 한다.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자기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그러려면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빨간색 불을 피우지 못했다고 해서 좌절할 게 아니라 나의 색을 지닌 불을 피우며 살면 된다고 강조한다. 장미는 장미로, 개나리는 개나리로 만개할 따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마음을 잘 잡아야 색채를 볼 수 있고, 그래야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한다.
매달려 있는 곳은 절벽이 아니다. 절벽이 아닌데 절벽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손을 놓으면 자유가 있음을 모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