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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당 심한기 May 23. 2024

사람과 관계에 대한 명상

사람과 관계에 대한 명상 


#1 관계는 숨을 쉬고 반복된다.  

존재하니 관계하는 것인가? 관계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인가? 

당연히 존재하기에 관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과학적 사고(상대성이론, 양자역학)로서 관계가 가능할 때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고정된 실체(존재)는 없다.’라고 말하는 불교의 사유와도 같다. 과학과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와 관계의 실체를 따져보지 않더라도 관계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달라 질 수 있음은 삶의 경험으로도 충분하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계는 멈추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 지쳐 아무도 없는 숲 속으로 피신을 했다고 해도 관계는 멈추지 않는다. 나무, 바람, 꽃, 하늘, 별과 관계해야 한다. 그 어떤 순간에도 관계의 끈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관계를 사람과 사람에게만 연결된 고리로 판단하는 것도 안일한 생각일 수 있다.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의 판단과 상관없이 매 순간 관계의 꼬라(kora)는 순환하고 있다. 결국 이 반복의 관계는 습관과도 같다. 어떤 관계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관계의 색깔이 만들어진다. 관계의 피곤함을 타자, 집단, 환경(지역)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나의 습관 안에 관계의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습관은 반복으로 만들어지고, 반복되는 것이 습관이 된다. 

내 안의 있는 관계의 습관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2 공감하는 유전자가 조금 더 평화롭다.

진화론에서는 친절한 유전자가 변이와 생존의 확률이 높다고 한다. 생존만을 위한 친절함은 건조하지만 공감하는 유전자는 지혜로운 진화의 선택이었다. 공감의 의지로 시작된 관계는 흔들리거나 틀어져도 뒤끝의 아픔이 덜하다. 공감은 일상과 삶 그리고 관계는 결국은 상호적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결국 나를 알아가는 보약일 수 있다. 관계의 방향일 때 공감이 시작되며 공감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잘 살피고 질문하는 것은 인지적 공감의 시작이고 이는 정서적 공감과 공감적 배려와 이어진다. 공감은 타자와의 관계만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의 실천이다. 모든 것들과 공감하며, 관계하며 살 수는 없다. 적절한 자기 선택과 판단이 필요하다. 관계의 습관을 알아차릴 수 있는 노력과 공감을 만들어가는 노력은 다르지 않다. 

관계의 아픔은 공감의 깊이와 반비례 한다.       

 

#3. 시간에 대한 세계관 그리고 헤어질 결심 

평면의 지도가 아닌 원형의 지구본을 보면 원형으로서의 실제가 보인다. 내가 살아가는 동네도 우주도 모두 360도 원형으로 존재한다. 동네(지역)에서 아등바등거리고 있을 때도 우주의 시계는 한 없이 천천히 돌아간다. 분 단위 또는 시간 단위로 쪼개어 살아가는 일상이라면 우리는 시간에 갇혀버릴 수 있다. 관계의 문제도 시간에 대한 세계관에 따라 해결의 방식이 달라진다. 길게 또는 넓게 보면 관계도 함께 평온해질 수 있다. 어떤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평균시간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휠씬 길며 보통은 다음세대로 넘어간다. 무엇이든 그것을 떠나보면 더 잘 보인다. 공감의 관계도 유지만을 위함이 아닌 유연하고 덜 아픈 헤어짐을 위한 지혜이다. 지금 당장의 관계에만 집중하지 말고 관계의 시간적 세계관을 넓혀보자. 지구의 나이는 45억 4천만 살이고, 현생인류가 나타난 시기는 고작 20만 년 전이다. 우주의 시간개념은 더욱 광대하다. 관계의 시간관을 넓게 감각한다는 것은 관계의 시작과 유지에만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이별의 과정도 소중하다. 헤어질 결심을 위한 과정, 헤어지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아름다운 헤어짐은 또 다른 아름다운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 관계의 시간을 길고 넓게 보면 해결의 틈이 확장될 수 있는 것처럼 만남, 유지, 헤어짐 그리고 또 다른 만남이라는 관계의 순환은 우주의 순환과 다르지 않다. 

이는 유연하고 덜 아픈 헤어짐의 지혜이기도 하다.      


#4. 동네와 우주 

동네에서 즐거우려면 동네 속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동네와 동네, 동네와 지역, 지역과 지역, 동네와 우주 모두가 강력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몽골의 모래바람이 불면 우리 동네 일기예보에는 황사(초미세먼지) 경보가 울리고 태양의 온도가 높아지면 지구는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들이 연결되고 순환하는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흔들어 봐도 좋다. 그리고 우주와 노마드의 차이를 실제 거주하고 것으로만 판단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이 동네에 서 있으면 나의 동네이고, 내가 저 지역에 서 있으면 나의 지역이고, 내가 우주와 교감하면 나는 우주가 된다. 그래서 동네와의 행복한 관계를 위해서는 가끔 동네를 떠나봐야 하고 전혀 다른 동네를 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떠나보면 더 잘 보일 때가 많다. 떠난다는 것은 벗어남이 아닌 연결의 확장이다. 

삶을 숙제처럼 살아가기 보다는 ‘여행하는 영혼’처럼 살아보는 것이 행복하지 않을까?       


#5. 경험의 축적이 관계의 축적이다. 

관계의 시간관이 여유로운 만큼 관계의 유연함이 만들어진다. 관계를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과정 자체가 관계의 축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냥 겪어봐야 안다라는 무책임한 뜻이 아니다. 즐거운 관계 또는 쓰리고 아픈 관계의 경험에 대한 메타적 사유가 가능하면 메타적 경험의 축적은 관계의 축적이 될 수 있다. ‘메타’라는 뜻은 ‘그것에 대한...’이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관계에 대한 사유를 시작으로 관계에 대한 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런 과정들은 똑같은 반복이 아닌 축적으로 진화한다. 자기-기획에 대한 메타적 사유 역시 기획력의 축적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생각과 감정은 분리되지 않는다. 생각의 토대가 감정으로 연결된다.      


#6. 진심의 생존과 실존 

먹고 사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나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의 간극은 늘 존재한다. 생존에 집중하던 실존에 집중하던 결국은 자기 선택이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관계를 만들어가거나 자체발광을 위한 무대로서 지역을 선택한다면 끊임없는 집착과 불안이 동반된다. 나의 실존이 연결될 수 있는 진심의 관계는 마치 인드라망(因陀羅網, Indrazala)과 같다. 각자의 빛과 부족함 등이 서로를 비추고 응원한다. 요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유행하고 있고 집중 받고 있는 단어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or)’는 참 못생긴 단어다. 원래 있는 것, 잠재된 것도 중요한데 자꾸 새로운 것만을 내놓으라고 공공적, 암묵적 압박을 하는 듯하다. 목표달성을 위한 건조한 관계만을 부축이는 것 같다. 본질적 원형을 찾지 못했을 때 우리는 쉽게 영어를 가져다 쓰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발견(창발)하고 이를 생존과 실존으로 연결하는 일은 소중하다. 하지만 진심이 생략된 정책적 유행어를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삶에 필요한 단서에는 탈성장, 다양성(종다양성, 문화다양성), 반데이터 그리고 진심도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한다. 수확하지 않은 것을 목표로 잡초와의 공존을 위한 텃밭을 가꾸는 이상한 예술가 역시 진심의 생존과 실존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6. 헤밍웨이보다 고양이가 좋다. 

멀리 있는 관념적 대상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고양이가 소중하다라는 말이다. 히말라야의 승려들이 매일 아침 죽음을 떠올리는 습관은 먼 죽음에 대한 염려나 불안이 아닌 오늘 그리고 지금-여기에 진심의 대한 찬양이다. 앞서 주절거렸던 거부할 수 없는 관계의 반복 속의 나의 습관, 관계에 대한 공감과 우주적 시간관, 여행하는 영혼으로서의 지역, 헤어질 결심, 관계의 축적, 진심이 생존과 실존은 지금 내 앞에 있는 관계의 가능성으로 시작될 수 있다. 지금-여기의 공감하고, 지금-여기와 연결되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관을 넓혀가고, 사람과 관계를 축적해가며, 진심의 생존과 실존을 찾아가는 여행하는 영혼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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