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가서 호텔을 진두지휘하다

집이랑 직장... 모드 전환 안 되는 남자

by 문맹

미천한 집중력을 가진 나는 무엇인가에 푹 빠졌다가도 나올 때에는 홀딱 가볍게 빠져 나오기에 무엇인가에 깊숙이 빠져 집중하다가 풀려나는데 한참 걸린다는 것이 피상적으로만 이해가 간다. 집중력이 강하다 못해 뭐 한가지 하면 다른 모드로 전환이 안되는 우리집 아저씨는 휴가 갈때마다 휴가지에 도착해서도 휴가 모드로 전환되는데도 오래 걸린다.


휴가 이야기에 앞서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얼마나 집중하고 일하는지는 모르지만 남편은 예로부터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서 모드전환이 잘 되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제가 있으면 (식기 세척기가 고장났다거나 창문이 잘 안닫긴다거나) 공구함을 다 꺼내서 제깍 제깍 해결해야 하고, 우편물을 뜯어서 해야할 일이 있으면 (세무사가 방대한 자료를 요구했다거나, 돈을 내야 한다거나...) 그것이 모두 처리될 때까지 저녁식사를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애들이 집은 회사고 아빠는 COO (최고운영책임자 chief operating officer)로 자기들을 직원처럼 대한다고 불평하며 아빠를 놀린다. 물론 다행히 나는 몸부림 치면서 이 게임에서 빠지기에 애들은 나를 CEO라 부른다 - 아빠가 감히 뭘 시킬 수 없는 강하고 높은 분.


때로는 밥 먹으면서 애들하고 대화할 때도 회의를 진행하듯이 하고 (자기가 실컷 말한 뒤에 애들 이름 돌려 불러가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너는 또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놀러 갈 계획을 짤 때도 틈틈이 회사일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재깍재깍 의사결정해서 단톡방에 보고하고 챙기고, 아직 안된 일은 묻고 또 묻고 체크될 때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무진장 나에게 구박을 받는다. 이것이 집인지 사무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느냐고... 야단 맞고 나면 정신은 들지만 이렇게 타이르고 야단치는데도 한 방에 안바뀌는 것을 보니 그냥 인이 박힌 습관이라 같이 살아 나가야 한다.


이 버릇은 휴가 가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독일 내에서 휴가를 보낼 때는 좀 조용한 편이다. 일단 독일 호텔은 대부분 고장난 것을 방치하지 않기에 남편의 레이다에 걸릴 것이 별로 없거니와 남편과 비슷한 사람들이 이미 방문하여 있었던 문제들을 다 해결했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영국에 휴가를 가면 이 버릇이 최악이 된다. 영국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에 비해 망가지고 고장난 것 그리고 청결 사항에 대해 덜 예민하다. 영국 브라이튼에서 머무를 때 조금 오래된 그러나 꽤 이름 있는 호텔에 머문 적이 있었다. 이 오래된 호텔은 부분 부분 리노베이션을 하긴 했으나 여기저기 손 볼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삐걱 거리는 현관문 (사실 방마다 조금씩 다 삐걱 대기도 했다), 카펫 곳곳에 무엇인가 흘려서 얼룩짐이 보이고, 화장실 등도 10개면 8개만 켜있고 2개는 망가져 있고 뭐 이런 식이였다. 나 같은 사람이 지내는 데는 전혀 문제없었으나 남편의 눈에는 그냥 모든 것이 거슬렸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내가 국제콘퍼런스 발표하느라 브라이튼에 함께 가 있었던 것인데 내가 3박 4일 일하는 동안 남편도 호텔에서 열일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니 그 당시 6-7세였던 애들이 돌아가며 숨 가쁘게 호텔에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나에게 보고했다. 남편이 더욱 흥분하는 지점은 영국 호텔에는 이런 것을 신고해도 독일 호텔에서처럼 제깍 제깍 반응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이 다르기에 그럴 것이고 (등이 2개 꺼졌지만 8개가 있기에 아주 급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들이 무시할 것을 잘 알기에 (글로벌 회사에서 일해서 나라별 유러피안들의 경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남편은) 신고도 못하고 아이들에게 잘못된 부분들을 설명해주며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정점은 이태리 가다 호수에 에어 비엔비에 머물렀을 때 찍었다. 그 에어 비엔비는 젊은 이태리 부부가 강아지 한 마리와 운영하는 예쁜 집으로 오픈한 지 6개월 밖에 안된 곳이었다. 호숫가에서 제법 떨어진 집이지만 깨끗하고 무엇보다 식구수대로 자전거를 대여해 준다고 해서 흥분된 마음으로 예약했었다. 우리가 자전거 투어를 가기 위해 주인에게 자전거를 받았을 때 난 직감했다. 앞으로 1시간 안에 출발 못한다고.


주인이 빌려준 자전거는 나처럼 잘 모르는 사람이면 바로 출발했을 컨디션이었지만 남편은 아주 공손하게 펌프가 있느냐 물었다. 이태리 주인은 아마도 그전에 언젠가 독일 손님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자전거 타이어 펌프와 동시에 작은 공구함도 내 왔다. 남편은 자리를 깔았다. 4개의 자전거를 빤질빤질 될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펌프질을 하고 자전거의 헐거워진 부분들을 다 조이고 안장까지 몸에 딱 맞게... 마치 온 가족이 뚜르드 프랑스 출전하듯이 자전거들을 갈고닦았다. 1시간 후 자전거는 새로 산 듯한 컨디션을 자랑하게 되었고 남편은 흡족하게 애들을 데리고 호숫가로 빤질빤질 고친 자전거로 출발했다.


3박 4일을 지낸 후 나중에 에어 비엔비 앱에 손님과 호스트가 서로에 대해 평가를 하는 란에 이태리 호스트는 거품을 물고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손님인지 찬양해 놓았다. 자전거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모든 것을 다 고쳐주고 갔다고 (계단 판넬도 고쳤다)... 그 후로 수퍼 손님이 되어 에어 비엔비에서 방을 구하기는 무진장 쉬웠다.



작년 겨울에는 새로 오픈한 스키 호텔에 갔었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이기 때문에 퀄리티가 높아서 여기저기 삐걱삐걱 거릴 것이 없기에 마음 놓고 갔다. 남편과 나는 스키를 타지 않기에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스키를 못 타서) 애들만 스키를 태우고 우리는 하루종일 호텔에서 사우나를 이용하고 책을 읽고 설경을 보면서 산길을 하이킹한다.


문제는 새로 오픈! 에 있었다. 새로 오픈하다 보니 히터에서부터 물까지 우리가 테스트를 하는 1번 고객이었던 것이다. 물론 각 방은 다 테스트를 걸쳐서 오픈했겠지만 이 모든 객실들이 꽉 찬 상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테스트가 되지는 않았고 이런 것은 투숙객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되어 가는 것이리라. 호텔 안의 가구며, 전등이며, 히터며 화장실까지 모두 새것으로 깨끗하고 튼튼한 제품들이라 문제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손님이기에 수건걸이의 히터가 꺼진 상태로 있었고, 화재 경보가 (딱 한번) 잘못 울렸으며, 침대 옆 읽기 등의 터치패드 작동이 가끔 오작동했다. 직감했다. 남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호텔 구석진 곳으로 조용히 옮겨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방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아주 신나서 호텔 프런트 데스크 직원과는 이미 베프가 되어 있었고 (신고하느라 하도 전화통화를 해 대서) 우리 방문은 아주 열려 있고 크로아티아에서 겨울마다 스키지역으로 와 일하고 간다는 전기공 아저씨와 이것저것 테스트하면서 일을 배우느라 신났다 (놀고 있던 울 남편은 아주 호텔에 취업할 뻔했다). 전기공 아저씨는 남편에게 분다바 (wonderful!)를 날리며 남편의 지적질 덕에 방마다 수건 걸이 스팀을 다 열 수 있게 되셨다. 반나절에 걸쳐 방에 있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다른 방의 구조까지 운운하며 호텔 직원들과 디스커션 한 바탕 해낸 후에 완벽하게 돌아가는 호텔을 만든 후 남편은 기쁨으로 휴가를 맞기 시작했다.

아 정말로... 이 모든 과정을 이렇게 편안하게 볼 수 있게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초기에 남편이 호텔에 대해 불만을 할 때 나는 이것을 내가 잘못된 호텔을 골라서 불평하는 것으로 알고 기분 나쁜 적이 많았다. 그래서 크고 작은 부부싸움도 했었다. 살면서 매번 휴가 때마다 이러는 것을 보고 그냥 문제를 보고 가만 두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이럴때는 그냥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런 직원을 둔 회사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러나 저런 남편을 둔 부인은 참....


이제는 휴가의 일정 부분을 호텔을 메니지 하는데 쓴 다는 것을 계산하고 가기에 바빠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아주 신기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가뿐하게 넘길 수 있다. 절대 창피하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도 우리가 부부인 줄 모르기에...


고쳐야 할 것이 있거나 문제가 있는 호텔은 연락 주시라. 독일 엔지니어가 돈 내고 숙박하면서 다 고쳐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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