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균쇠 확장판
한국은 벽돌책 읽기가 열풍인 듯하다. 아니면 알고리즘이 내 눈앞에 펼쳐놓는 유튜브 세상 속에서만 그런 것일까? 나의 유튜브 피드는 지금 책을 읽어야 부자가 된다고 난리다 난리.
김밥에서 고보 빼고 단무지 빼고 먹는 우리 애들처럼 나는 좋아하는 장르와 주제의 책만 쏙쏙 골라 편식하듯 읽어왔다. 알고리즘이 펼쳐주는 다독하면 부자 된다는 세상 속의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읽기 힘든 스태디 셀러들도 추천해 준다. 책을 열심히 읽으면 부자가 된다기에, 게다 어서 빨리 아동취향에서 벗어나 책 읽는 스펙을 넓혀야 하기에 제라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를 집어 들었다.
이 책을 소장한 지는 한참 되었지만 3장까지 흥미와 열의를 가지고 읽은 후 4장 끄트머리쯤에서 K.O. 되어 나머지 부분은 읽다 스르르 잠들거나 촤르르 넘기며 읽는 둥 마는 둥 하다 결국 못 참고 맨 마지막 결론부를 후르륵 읽은 후 책장 속에서 다시 나오지 못하게 꽉 끼워 꼽아 놓았다.
서론 부분은 정말 가슴 떨리고 흥미진진해서 나도 퓰리처상 수상작인 벽돌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지식인이 되어가구나 하는 착각에 빠져 으쓱해졌었다. 그런데 본문에 들어서서 농작물 이야기가 세세하고 길어지고 동물이 가축화되어 가는 과정을 깊숙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는 동물들 이름과 지구본에서 어디 붙었는지 모르겠는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이 나오면서부터 책을 손에 들고 소파 구석에 앉아 몇 번 헤드뱅을 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 책의 두께는 나이 들어 손목의 힘이 빠져나가고 관절이 녹슬고 있음을 절실하게 일깨워 주기까지 했다. 대체 왜 이리 무거운가…
언젠가 한 번은 독서 중에 심지어 경미하게 정신을 잃었다가 깼는데 티셔츠에 침이 흥건히 고여있었다. 온몸의 액이 다 말라가는 서러운 갱년기에도 이렇게 들쩍 하게 침을 흘릴 수 있다니 놀라웠다. 이게 벽돌책의 힘이구나. 쩍 마른 수액까지 짜내어 뿜어 나올 정도로 정신 혼미해지는 디테일과 통찰이 담긴 책. 이 책을 언제 다 읽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나는 다이아몬드 박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지 않아도 이미 퓰리처상을 비롯 세상에 인정 충분히 받은 명작이기에 졸면서 침 흘리고 헤드뱅하는 나까지 굳이 충직한 독자 대열에 끼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분의 책을 읽고 불꽃같은 영감을 받아 사피언스를 쓴 유발 하라리의 극성팬이다. 그렇다면 나는 사피언스 다 읽었는가- 아니다. 하라리의 다른 책들은 열심히 사서 읽었으나 가장 유명한 호모사피언스는 딸이 영어판으로 홀라당 사버린 바람에 아직도 진도를 빼지 못하고 있다 (물론 따로 한국어판으로 사서 읽으면 되는데 왠지 이 책은 원서로 읽고 싶은 똥고집이 발동해 버티고 있다. 꼭 읽고 싶지만 무덤까지 그냥 가져갈 책 또 한 권 추가다!)
총균쇠를 언제 다 읽을지 모르지만 병원균이 인류의 발전에 얼마나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나 역시 살면서 확보하였다. 남편과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여름휴가를 동남아에서 자주 보냈다. 우리 둘 다 못 알아듣는 말의 근원지로 휴가를 가는 것에 항상 의견 일치를 보았고 유럽의 거친 파도와 알 굵은 모래사장, 절벽과 바위 조각돌로 된 해안보다는 모래사장도 곱고 천사같이 친절한 호텔직원들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동남아를 선호한다.
이 휴가를 위해서는 일단 우리는 애 둘을 바리바리 싸서 데리고 한국으로 입국해 이제나 저제나 손주들만을 기다리시는 친정부모님께 애들을 맡기는 것으로
대장정을 시작한다. 울 부모님이 보고 싶은 생명체는 사실 나나 남편이 아닌 딱 애들이기에 두 팔 벌려 이 휴가를 열렬히 환영해 주신다. 사위 대접은 딱! 하루에 성대히 끝나시고, ‘빨리 안 가냐?’ 하신다. 힘겹게 영어로 사위와 이야기하느라 씨름하는 것보다 신나게 애들을 놀이터로 노인정으로 데리고 다니시면서 바깥구경도 시켜주시고, 집에서 할머니표 집밥도 신나게 해 먹이시고, 그동안 가까이 있지 못해 사줄 수 없던 간식도 장난감도 우리 눈치 안 보시고 왕창 사주실 수 있기에 이 시간을 학수고대하신다. 물론 애들도 마찬가지이다. 엄마 아빠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시간은 눈치 안 보고 오락하고 독일에서의 쳇바퀴 돌던 일상에서의 탈피이자 큰 사랑 안에서 대놓고 허락받고 벌이는 일탈의 파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3박자가 딱딱 맞아 우리는 자주 애 없는 휴가를 떠났었다.
발리의 한 리조트에서 오랜만에 애들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이다.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점심, 저녁 식사는 로컬 식당에서 할 예정이었고 동남아의 여러 가지 바이러스 및 박테리아에 취약 남편은 철저하게 구워지지 않은 음식이나 샐러드는 입에 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발리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오염된 음식 섭취로 인해 Bali Belly에 감염되면 안 되기에... 발리 밸리는 한국사람들에게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나는 우리 집 아저씨만큼 동남아 음식에 취약하지는 않다. 때깔도 좋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길거리 음식들을 남편의 민감하신 위장 혹은 미천한 면역 시스템 때문에 먹을 수 없다니 실망스러웠으나 어쩌겠는가 아픈 사람이랑 휴가를 보내는 것보다는 나으니 같이 조심조심 음식을 가려가면서 먹어야지. 그런데 이렇게 신경 썼음에도 불구하고 발리병원균의 공격에 속수무책 걸려들었다. 생선구이를 맛나게 먹고 칵테일을 한잔 마시고 호텔에 들어왔는데 남편이 갑자기 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바로 따주지 않는 음료수는 입에 대지도 않고 조심했었는데 칵테일 속에 들은 얼음 덩어리가 화근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순식간에 열이 펄펄 오르더니 밤새 내내 시트가 축축해질 때까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끙끙 앓았다. 가져간 해열제를 복용하고 어찌어찌 밤을 견뎠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열이 내리지 않고 도저히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되어 어쩔 수 없이 방문 의사 서비스를 요청했다.
한 시간 후 호텔에 도착한 젊은 의사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간단하게 남편의 열을 재고 맥박을 잰 후 유창한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다. 해열제 먹고 이 삼일 후면 좋아질 거라고. 그의 익숙한 진료 태도에서 비슷한 증상으로 자신을 찾았던 양인들이 많았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호텔방의 커피머신을 이용해 얼렁 커피 한잔을 내려 대접했더니 흔쾌히 시간을 더 내어 그동안 이렇게 속수무책 열병으로 스러져간 양인들을 얼마나 많이 진료해 왔는지 무용담처럼 이야기해 준다. 순간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넘어간 침략자들이 천연두, 흑사병, 홍역들의 전염병으로 얼마나 많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속절없이 죽음으로 몰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유럽인인 남편이 발리균으로 끙끙 앓는 것이 꼬소하게 느껴졌다- 아, 내가 미쳤나 보다. 남편이 휴가 와서 죽도록 아픈데 이런 상상을 하다니. 나는 아직도 유럽문화에 압도된 상처와 습득된 열등감을 남편을 통해 이렇게 기이한 방법으로 풀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천벌을 받겠지만 나를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
친절하고 젊고 자그마한 의사 선생님은 불구덩이 같이 달아오른 몸뚱이로 휴가지 호텔의 침대보를 푹푹 적시고 있는 산만한 덩치의 가여운 덕국인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진료비 100유로를 가볍게 청구하여 챙기시고는 유유히 호텔방을 떠나셨다.
익숙하지 않은 세균은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처음으로 직접 느끼게 되었다. 풍토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병에 걸리면 정말 속수무책이다. 이 열의 원인이 무엇인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지경인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기에 걱정 근심은 말할 것 도 없고 죽을 수도 있겠구나 공포가 엄습한다. 이렇게 발리서 한 번만 혼났으면 해프닝으로 끝날 텐데 극도로 조심했던 태국 여행에서도 중국 여행에서도 남편은 비슷한 열병을 앓았다.
왜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남편은 동남아의 병원균에 이리 취약한 것일까? 동남아 여행의 장점인 저렴하고 다양한 로컬 음식과 음료는 남편땜시 구경도 못한다. 리조트 밖에서 식사는 그림의 떡이고 로컬음식점에 가면 바싹바싹 구워준 생선만 먹고 나머지는 반찬은 차려준 그대로 반환이다. 그렇게 조심했다가도 방심하는 사이에 남편이 열병에 걸리면 나는 그 휴가 일주일 내내 비자발적 나이팅게일이 되어야 한다. 과거 백인 정복자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가지가지의 질병을 원주민에게 옮겨 한 큐에 대륙을 정복했듯이 동남아의 이 미미한 병원균은 거구인 울집 아저씨를 단방에 KO 시키고 나를 간병인으로 만들기를 수차례 하였다.
이제 와서야 결혼을 무를 수도 없고 내 인생에서 마음 놓고 즐기는 동남아 휴가는 이 병원균에 취약한 약골의 덕국 아저씨 때문에 물 건너 가버렸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많은 독일인들이 동남아에 여행 가서 비슷한 옥고를 치른다는 것을 알았다. 호주친구의 독일남편도, 미국친구의 독일남편도 모두모두 동남아에 가서 2-3주 휴가면 1주일은 호텔콕하며 열병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서 바이러스 및 박테리아에 취약하지 않을까. 의사들이 말하듯이 과도하게 위생을 챙겨 면역세포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요꼴이 자주 나는 것이다.
식품 알레르기 역시 대체로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 더 많이 발견되는데 아무래도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일수록 인스턴트나 가공식품 소비가 많고 과도하게 위생을 챙기며, 모유 수유 기간이 짧기에 면역력이 떨어져 그러하리라. 이제 우리나라도 제법 알레르기 환자들이 많아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주변에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었다.
독일에서 애들을 키우면서 놀란 점은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간에 자신의 몸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고 어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또 어떻게 조심하고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사만큼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의 생일마다 케잌이나 머핀을 구워가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야기되는 견과류 알레르기, 사과 알레르기, 계란, 우유, 밀가루 알레르기… 이런 재료를 빼면 대체 무얼 먹고 사느냐~~~
어찌 되었든 동남아에 여행 가면 나의 튼튼하고 면역력 강한 유전자가 더욱 빛난다. 20년 결혼생활 동안 나는 웬만한 병원균은 침투하지 못하는 강인한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병원균에 속수무책이라 휴가마다 무너지는 남편덕에 매우 가볍고 손 쉽게 증명해 냈다.
남편을 많이 닮은 딸아이는 먼지 알레르기, 꽃가루 알레르기 등등 알레르기를 달고 살아서 자기 방 청소기 한 번 돌리고도 엣취 거리고 코 푸느라 난리다. 반면에 나를 많이 닮은 아들은 3개월간 단 한 번도 자기 방안 청소기를 돌리지 않아도 책상 밑 먼지 덩어리를 발로 차 가면서 끄덕 없이 잘 지낸다 (나는 게으르기에 절대로 아이들 방을 청소해 주지 않는다).
언젠가 친구가 놀러 온다길래 아들에게 청소라라고 잔소리했더니 친구도 자기처럼 똑같이 더럽기에 청소를 하는 것은 전기 에너지 및 (게임에 쏟아야 할) 본인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가치 없는 일이란다. 아, 나의 우성 유전자가 지나치게 울트라 우성으로 발전되어 병원균, 먼지 및 각종 미생물들과 행복하게 공생하는 아들이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하여튼 남편과 딸아이는 나와 아들의 균 방어력이 갑이라고 항상 부러워한다.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독일인의 면역력 향상을 위해 우월한 K 유전자를 투척하여 50프로 성공시켰으니 이 생애에서 나의 매우 이타적인 유전자는 할 일을 다하지 않았나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