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아줌마의 밋밋한 3일간의 일탈
해외 살이 20년. 명절에는 고향의 산천을 그리워하면서…. 가 아니라 체면 따위 거두어 차고 말하자면, 기름지고 칼로리 풍성한 음식을 죄책감 없이 몇 박 며칠 동안 먹고 또 (데워) 먹을 수 있었음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요즘 사는 세상은 유튜브만 켜면 오만가지 한국의 소식을 접할 수 있고 심지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기에 관심만 있으면 이역만리 외국이 아니라 우주 정거장에 살더라도 한국 소식을 깨알같이 접할 수 있다. 그러기에 멀리 산다고 해서 더 이상 예전처럼 내 나라 소식이 그립네 어쩌네 감정팔이를 하면서 슬퍼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없다. 그뿐이랴, 인터넷과 의지만 있으면 보고 싶은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시간이 허락되는 한, 땡전 한 푼 들이지 않고 밤새 내내 영상통화도 가능하다. 그러기에 추석이라 해서 혼자 계신 모친이 신경 쓰이는 것 빼고는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이 갑자기 애달프게 보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수고로 두고두고 오래 즐길 수 있었던 명절음식만이 간절히 생각날 뿐이다.
지난 20년간 때때마다 가졌던 명절의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오히려 주변에 가까운 한국분들이 많았을 때 더 진해졌었다. 함께 모여서 명절 음식을 해 먹으면 K-공동체적 감정을 최대한 불러일으켜가면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시간이 명절임을 확실하게 각인하면서 보냈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확연히 달랐다.
올해 18살이 된 큰 아들은 독립해서 지난달에 대학도시로 이사했고, 고3인 딸내미는 이번주에 비엔나로 일주일간 수학여행을 갔다 - 나 같으면 너무 좋을 텐데 남자 친구와 일주일 동안 떨어져 있기 싫다고 징징대며 떠났다. 아무리 내 딸이지만 이렇게 외계인스럽게 굴 때는 정말 소름 끼친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불평을 해??? - 이렇게 새끼들이 뭔가 나의 성향과 다른 행동을 하면 십중팔구 남편 유전자의 장난이 분명하기에 무슨 연유든 간에 남편을 꼭 괴롭혀 줘야 속이 풀린다. 약간 가정판 글로리 같이 들리겠으나 이 괴롭힘에는 이유가 있다. 수학여행이 싫어? 그것도 비엔나로 가는데? 남들과 함께 하는 것에 별 관심 없는 DNA를 딸에게 장착시켜 세상에 나오게 한 남편도 친구들과 비엔나까지 놀러 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의 감사함을 모르는 딸과 함께 구박을 받아 마땅하다. 그게 왜 자신의 잘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겠지만 남편은 일단 꼬랑지를 내리고 나의 분노에 대해 대꾸하지 않는 전략을 취했다 (대부분 눈치가 없어 내게 혼나면서 사는 남편은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때에 놀랍게 눈치를 발휘하기도 한다). 다시 이 남자의 딸내미 이야기로 돌아가서 탐탕치 않은 맘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딸은 당일 학교 버스에 오를 때 남자 친구로 하여금 자신을 배웅하게 만드는 사랑의 세레나데의 시나리오를 펼치며 떠났다. 그게 누구의 아이디어였든지 간에 아주 옆에서 보고 있기 눈꼴셔 혼났다. 물론 그 둘이 집을 나설 때는 인자한 엄마의 모습으로 배웅했었고 심지어 딸의 남자 친구에게는 배웅해 줘서 고맙다고 까지 말하는 위선적 행동을 한 점의 부끄럼 없이 자행해 냈다. 아, 애미노릇 힘들다. 언제쯤이면 날것의 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른이 되기도 힘들지만 어른으로 지속적으로 살아가기도 쉽지 않도다. 특히 이런 유치 찬란한 적군들에게 둘러 싸여 살면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이 이성의 끈마저 언제 탕! 하고 끊어질지 모른다.
은퇴를 억지로 번복하고 재취업되어 끌려나간 남편은 이번주에도 감사하게 유럽을 종횡하며 뺑이치며 일하고 있기에 나는 공교롭게 추석 전야부터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 오 이것이 대체 얼마 만에 생긴 프리덤인가... 장성한 자식들은 이제 내 돈이 필요할 뿐 도움은 필요 없기에 가정에서 애미로서 아내로서 대단히 해야 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 나지 않는 귀찮은 집안일이 얼마나 많은지. 집안일은 명실공히 풀타임 잡이고 4인의 가족을 책임지려면 풀-풀타임 잡이다. 요리, 베이킹, 장보기, 청소, 집안 인테리어 및 교육까지 각 잡고 하면 끊임없기에 집안일을 폄하하는 자들은 태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사실 잘난척하면서 지절거리고 있지만 나는 집안일에 탈랜트도 없고 취미도 없는 데다가 이젠 늙어서 제대로 할 힘도 없다. 팔팔할 때는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하루에 한 개씩 프로젝트를 만들어 무언가를 해 냈었다. 미니멀을 실천하기 위해 온 가족의 옷장을 홀딱 뒤집어 각 10벌만 남긴다거나 집안의 가구를 번쩍번쩍 혼자 옮겨가며 새로운 분위기를 창출하기도 했었고 발코니에 새로운 녹색 식구들 들여놓는 등등... 다 지나간 과거로 이제는 내 한 몸 아프지 않게 숨 쉬고 살아가는 것만도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집안일은 식구들이 먼지에 둘러싸여도 죽지만 않을 정도로 청소하고 밥은 냉동식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적절하게 60대 40으로 섞어서 상차림을 하는 꼼수를 부리며 살림을 한다.
게우게우 이렇게 살고 있었는데 모든 식구들이 이번주 3일간 동시다발적으로 집에 없다니 웬 떡이냐 싶었다. 오... 추석에 나는 (드디어) 혼자가 된 것이다. 호움 얼론! 멤버 한 명만 빠져줘도 집이 헐거워지면서 집안일 부담이 확 줄어드는데 3 멤버 모두 제 발로 제갈길을 떠나 주니 우리 집의 현 상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5성 호텔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감격이다. 게다가 개강도 10월이라 (할 일은 많지만) 출근 전이다. 직장인 아줌마의 기적 같은 3일간의 '나 홀로 집에'가 시작된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볼까? 딱 3일인데 너무 야단법석인 것 같다. 대체 어떻게 보내야 이 아름다운 3일이 빛이날 것인가? 무진장 떨렸다. 내게 다가올 이 원초적 평화는 곧 스러질 안개 같은 것이기에 내게 너무나 소중했다. 3일 후면 집안 멤버들이 다 돌아오고 다음 주면 개강이라 살 떨리게 바빠질 것이고 학기 초부터 국가고시 운영부터 오마나 정신없을 것이기에... 이 3일의 참평화는 잘 보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안에 창조적 공간을 창출 위해 모든 삶을 빈 공간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늘 숭배해 왔다. 물론 게으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To do list를 만들어서 빡빡하게 사는 삶을 살아 본 적도 없고 그러한 삶은 나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시도도 하지 않는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리스트를 지워가며 미친 듯이 생산적으로 사는 삶은 같이 사는 우리 집 아저씨의 삶이다. 나는 리스트까지는 가끔 만들지만 무엇부터 해나 갈지부터는 그날그날 되는대로 정해야 일이 잘 된다. 시간표까지 빡빡하게 짜놓고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까지 뭘 하고 이런 구속은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게다가 이 귀중한 시간을 보내는 재료로 전혀 신선하지 않다. 그럼 이 3일의 자유는 어찌 보내나?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즉 절대 하지 않을 Not-to-do 리스트를 만들었다.
1.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사람을 무진장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호기심이 많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 진정한 자유가 주어진 이 어마어마한 시간에 꼭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추석에 할 일은 아니다.
2. 음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추석에 웬 청개구리 같은 소리냐. 매끼를 해 먹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야 드디어 해방되리라. 냉장고 있는 것만 꺼내서 고대로 생식을 할 지어다. 굶을 수는 없고 매끼를 사 먹기에는 내 주머니 사정이 대단히 초라하다. 그러나 불질은 싫다. 그러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음하하.
3.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맘 가는 데로 살아보리라. 그러면서도 이 여유롭고 귀중한 시간을 절대로 허투루 쓰지 않으련다. 써 놓고도 뭔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가능한지 실험해 볼 테다.
결혼하고 20년 만에 내 생활에 처음으로 찾아온 감격스러운 자유. 3일간 혼자 있을 수 있는 기회! 로또는 돈으로만 맞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시간과 자유로 올 수도 있구나. 감격스럽다.
헐겁게 살아낸 지난 3일
첫날.
6시 45분에 일어나서 여느 때와 같이 무슬리로 아침식사를 했다. 다른 점은 아주 여유 있게 식사를 했다. '여유 있게'를 정의하자면 식탁 위에 핸드폰을 떡 올려놓고 이것저것 돌려가며 뉴스를 틀었다가 노래를 들었다가 내 맘대로 채널을 돌려가며 뚝뚝 흘려가며 식사를 했다. 애들이랑 같이 식사를 하면 아직도 모범을 보여야 하는 애미이기에 이런 짓은 자주 못한다. 특히 남편까지 같이 식사를 하게 되면 넷이 다 앉아서 대화해 가면서 화목하고 건강한 가족임을 표방해야 하지 않는가.
아침식사부터 일탈이다. 핸드폰 삼발이를 무슬리 그릇 앞에 딱 세워 놓고 눈이 핸드폰에 고정이라 숟가락을 볼 틈이 없어 핀트가 맞지 않아 음식을 입술 옆으로 턱 아래로 질질 흘려가며 우하하 우하하 웃으면서 나사 빠진 사람처럼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조식을 마쳤다.
그 후 이도 닦지 않은 상태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사실은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눈이 잘 안 보여서 큰 화면으로 보려고 노트북을 가져왔다가 나도 모르게 메일을 확인한 것이 화근이었다. 답장해야 할 메일이 이미 수십 통이다. 왜 학생들은 등록기간을 자꾸 놓쳐서 나한테 해달라고 시키는 것인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해도 되는 일을 이메일이 쌓이는 것을 참지 못해서 (게으르지만 이메일이 쌓이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학교 온라인 플랫폼에 들어가서 수업 듣겠다고 꾸역꾸역 메일을 써준 학생들을 수강신청 명단에 한 명씩 욱여넣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이렇게 기계적이고 간단한 일은 시간은 많이 잡아먹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기에 아침 시간을 줄줄 허비하면서 일하는 척하기는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오늘은 나의 완벽한 평화의 첫날이 아닌가, 왜 이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지? 역시 한 번 일의 노예가 되면 어마무시한 참평화의 기회가 와도 미련천만 하게 중요하지 않는 일로 시간을 죽이게 되는 걸 보니 효과적으로 잘 노는 것도 참능력이다!
이래 저래 오전에 밀린 일 조금 하다 (슬프지만 아무리 방학이라지만 학교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시간이 홀딱 가버렸다. 아... 아까워 미치겠다. 11시 30분부터는 무언가 생산적인 일,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어서 색깔 카드의 지난 메모 보며 감탄한다. 어제의 나는 천재였는가? 쓸만한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오늘, 어제 내가 메모한 것을 보면서 너무 훌륭해서 깜짝 놀랐다. 항상 과거의 나의 생각이 더 위대한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머릿속에서는 콜라를 마셔야겠다는 것 외에 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일은 설마 이런 생각도 안 나려나. 겁나게 뭔 소리여?
색깔 카드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생각의 라인을 재배치하고는 바로 라인강으로 산책을 나갔다. 장장 두 시간 동안 멜론 톱 3위 2022-2023년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걸어 다녔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강가를 걸으면 주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상상의 세계에 빨려 들어간다. 현재에 머무르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는데 나는 계속해서 상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서 호흡이나 명상이 잘 안 된다. 미래에 중독되어 현재에 머무르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미래에는 돈 걱정 없이 한국과 독일을 뱅기타고 마구 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해야 그런 미래가 온다고 하도 유튜버들이 들들 볶길래… 굳게 믿고 해야 한다기에 프라이빗 제트를 타고 다니는 신나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이것이 환경오염의 가장 큰 주범이라 하지 않았나?) 올해는 돈도 없고 시간 없어 한국 못 갔는데 내년엔 갈 수 있으려나…라는 부정적인 말 말고 나는 아무 때나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다! 고 외치면서 강변을 헤매었다. (머리에 꽃을 꽂아야 했는데…)
두 시간 산책 후 다시 집에 들어와서 세탁기에서 빨래감을 꺼내어 걸고, 잠시 이메일을 확인한 후 챙겨야 하는 학교일을 최대한 빨리 해내고 오후 4시경에 또다시 집을 나왔다. 하루에 두 번 집을 나오다니 아무 목적 없이… 놀라웠다. 다행히 날씨도 화창하고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서 나의 이 정처 없는 산책을 도와주었다.
아~~~ 좋아라. 혼자 있어서 너무 좋고, 할 일이 없고 홀가분해서 너무 좋았다.
시내 근처의 야외 식당으로 가 와인 한잔과 트루펠 감자튀김을 시켰다. 감자튀김 위에 트루팰 맛이 나는 소스와 꽃가루와 파마잔 치즈를 사르르 뿌린 아주 맛나고 적은 양의 술안주였다. 내 주머니 사정에는 꽤 비싼 안주였는데 뭐든지 4인으로 쪼개서 살림해야 했기 값나가고 양적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했던 야속한 세월을 비웃으며 천천히 음미했다. 이것 보라고 나도 좀 럭셔리하게 살 수 있다고. 음하하 이런 맛으로 풍진 세상을 견디는 거다...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웨이터에게 양손을 흔들어가며 큰 소리로 계산하겠다 말했더니 금세 와서 살살 (비) 웃어가며 계산해 줬다. 대낮에 혼자 와서 벌겋게 되어가며 와인 마시는 동양여자를 많이 보진 못했을 것이고 목소리 우렁차진 나를 얼렁 집으로 보내고 싶었으리라.
한잔 걸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이 고작 6시 30분경 내가 생각해도 가소로웠다. 대충 세수만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스포티파이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막 따라 불렀다. 아무도 없으니 못 불러도 쪽팔일이 없다. 엄마일 필요도 없고 아내일 필요도 없고 그냥 날것의 내가 되어 맘대로 괴성도 질러보고 술도 한 잔 먹었겠다 울랄라 울랄라 신나게 노래를 했더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찐 행복이었다.
그리고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글을 쓴다. 술 취하면 글이 어찌 되는지 궁금해서. 한잔 빨고 쓰는 글은 좀 더 자유스럽고 창의적일 수 있지 않을까? 훌륭한 아티스트들은 마약을 하고 저세상 탠션의 작품을 창작하기도 한다는데 오랜만의 혼술 와인 한잔이 원래보다 훨씬 나은 글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마구 써본다. 음주집필!
둘째 날.
오랜만의 음주로 너무 일찍 8시에 잠이 들어서 새벽 한 시 반에 깼다. 뒤척이고 유튜브에서 책 읽어주는 사람들의 친절한 낭독을 들어가며 잠을 청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가 가늘게 잠이 들었다가 깨길 아침까지 반복했다. 우리 집 아저씨가 전화해서 깨울 때까지. 다시 6시 30분이고 남편은 출장지 호텔에서 가까운 베이커리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호텔 조식이 형편없으면서 비싸다고 미친 듯이 불평하면서 (남편은 불평 도사다. 독일인은 불평하지 않으면 아픈 것이라는 썰이 있는데 거기에 딱 맞는 프로토타입 독일인이다.) 나한테 일어나라 난리다. 더 잘 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잠이 더 오지 않아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다시 무슬리를 먹는 것으로.
최욱의 수요난장판을 유튜브로 들었다. 정치가 너무 속 시끄러워 안 듣고 안 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들으면서 부엌의 쓰레기봉투를 거두고 거실의 먼지를 털고 눈에 보이는 지저분한 물건들만 일단 눈앞에서 치웠다. 아침을 먹고는 오랜만에 독일어 교재를 들고 냅다 좋아하는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다시 귀에 멜론 탑 3을 끼고. 그리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방에서 보냈다. 졸고 음악 듣고 커피 마시고 책구경하고.. 가져간 교재는 꺼내지도 않았었다. 둘째 날도 이렇게 아무런 일없이 걱정없이 마음의 동요 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천국인가 싶었다.
드디어 자유의 마지막 날. 오늘 저녁이면 남편이 오고, 내일 아침이면 딸내미가, 오후면 아들이 차례로 에일리언 인베이젼처럼 집으로 복귀할 것이다. 아………드디어 3일의 평화가 막을 내리는구나.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얼렁 해치우고 마지막 자유를 불태우기 위해 바로 책방으로 튀어가서 독일어 문제집을 펼쳤다. 완전초급으로 푸는데도 새로 배우는 것이 많다. 안 틀리며 문제집을 푸는 것은 정말 10년 만이다. 역시 초보 독일어 문법책을 다시 하길 잘했다. 뭔가 배운다기보다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쑥쑥 풀리는 재미가 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건 공부라기보다 그냥 색칠공부 하듯이 하는 나의 명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레벨이 낮은 외국어 문제집을 푼다. ㅁㅊㄴ
공부를 아주 조금 하다 보니 이내 배가 고파져서 20분간 힘차게 시내를 가로질러 집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냉장고에 있는 치즈와 꺼내 토스트를 구워 함께 먹었다. 착실하게 불질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던 내가 기특하다. 물론 토스터기는 썼다.
45분간 SNS사냥질을 한 후 또다시 책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노트북을 등에 싣고 가서 이번달 신문기사 원고를 절반 완성했다. 오는 길에 슈퍼를 들려서 장을 보고 집에 와서 베이글에 칼로리 폭발 피넛버터를 왕창왕창 발라 먹고 발코니에 앉아 글을 쓰고 멍 때리기를 반복했다.
어둑어둑 어스름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3일이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별일 한 것은 없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살면서 너무나도 힐링이 된 시간이었다. 왜일까? 여러 가지 정체성을 다 내려놓고 정말 나일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어떤 특별한 일 없이도 이렇게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내가 시내를 번질나게 걸어 다닐 때 주변에 함께 있어줬던 모든 행인들, 책방 여기저기에 함께 있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주변인들이 있었기에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 같았다. 나의 존엄한 홈얼론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즐거웠던 것 같다.
이 아무것도 아닌 삼일은 내게는 로또 당첨에 버금가는 행복한 비움의 시간이었다. 책임감도 욕망도 바쁘다고 핑계 대는 삶도 다 비워내고, 걷고 글 쓰고 더듬더듬 독일어를 공부(?)하는데 다 써버렸다.
곧 가족들이 모두 다 돌아와서 내 생활을 도로 빼곡히 채울 텐데 이 조용하고 밋밋했던 일탈이 매우 그리워질 것 같다. 2023년 추석 홈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