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감수성
언어사회학 수업 시작 5분 전에 학생 T가 급하게 다가왔다. "수업 중에 잠시 나가서 전화 통화를 해도 될까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단번에 허락해 준 후에 무슨 일인지 물었다. 학생들의 사생활에 참견하면 안 되지만 T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봇물 같이 이야기를 토해낸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 토끼가 병원에 입원해 있고 담당 수의사에게 (수업시간 중인 1시에) 경과를 보고 받게 되어 있단다. 그녀의 토끼는 몇 일째 밥을 먹지 않아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의사가 이빨 문제라고 진단을 내려 이 치료를 받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먹는 것을 거부하여 다시 입원했다. 그리고는 입안에서 커다란 염증이 발견되어 수술까지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일이기에 수업시간 중에 꼭 의사하고 통화할 수밖에 없다며 힘주어서 설명하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워 웃음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다.
말 못 하는 토끼가 며칠씩 밥을 먹지 못하는데 얼마나 걱정되겠는가. 그 부분은 공감은 되었지만 이렇게 토끼에게 시간과 돈과 정성을 퍼붓는 학생을 진정으로 이해하기에는 동물, 특히 토끼에 대한 나의 감수성은 턱없이 부족하다. T에게 토끼는 가족이고 가족이 아픈 것이니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게다가 말 못 하는 짐승이 아파서 끙끙대며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아무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려고 해도 아픈 토끼보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면서 토끼의 증상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T가 더 애처로웠다. 심지어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야 했던 내 모습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만약에 토끼가 아니라 T의 가족이 아팠다고 하면 내가 아무리 속으로 라지만 웃을 수 있었을까... 이럴 때 나이 듦을 느낀다.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한 늙은이. 내가 이래서 가끔 십 대인 자녀들과도 마찰이 생긴다. 굶어 죽는 사람도 있고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널려 깔린 세상에 동물의 권리쯤이야 하는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게 드러내면 아이들 표정은 좋지 않다. 진보적이라 잘난 척하는 엄마도 어쩔 수 없는 구세대구나. 사람도 동물도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지 굳이 동물의 권리가 사람보다 못하다 주장하며 같이 잘 사는 방법을 외면하는 태도를 가진...
이틀 후 T를 다른 수업에서 만났다. 토끼의 안부를 물었더니 다행히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신경이상으로 최악의 경우 눈을 파내야 한단다. 아,,. 가엾은 토끼... 또다시 자세하게 토끼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는 T에게 TMI라고 경고했다. 동물 감수성은 모자라지만 눈 없이 살아가야 할 토끼를 가엾다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T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미 토끼에게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갔고 더 이상 고통스럽게 만들 수는 없다며 눈까지 파내야 한다면 영면에 취하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는 핸드폰 화면을 열어 건강했을 때에 뛰놀던 토끼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가슴이 미어지면서 나도 울컥했다.
나는 원래 동물을 좋아하고 결혼 전에는 항상 개를 키웠었다. 개와 고양이까지는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외의 애완동물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다 보니 관심도 없었다. 애 둘을 키우면서 애완동물을 키울 엄두를 못 내다보니 더 더욱이 마음이 멀어졌다. 유모차에 어린아이를 태우고 애완견까지 함께 산책시키는 이웃들을 보면 존경의 마음이 하늘로 솟구친다. 종이 다른 두 생명을 저렇게 우아한 모습으로 키울 수 있다니... 또한 애 없이 애완동물만 키우며 사는 사람들의 상대적으로 가벼워 보이는 생활을 질투하고 때로는 그들을 책임감 없는 사람들로 몰아세우기도 했었다. 힘에 겨운 육아로 마음의 그릇이 드라마틱하게 쫄아들면서 동물과 동물을 키우며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도 이해도 애정도 감성도 모두 말라비틀어져 버린 것이다.
독일은 날씨 좋을 때마다 계절에 관계없이 야외에서 식사를 자주 하고 우리 집에도 발코니에 작은 테이블이 있다. 오랜만에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밥상을 차리면 어디에선가 벌들이 음식냄새를 맡고 찾아오는데 녀석들은 제법 크게 왱왱대며 날아다니기에 시끄럽기도 하고 쏘일까 걱정도 되어 여유로운 식사에 영락없는 방해꾼이다. 하지만 보호 대상인 벌을 죽이면 5천 유로에서 5만 유로까지 벌금을 물 수 있으니 사람이 알아서 피해야 한다. 감히 파리채 같은 것으로 벌을 죽이려다가는 집안 기둥뿌리가 뽑힐 수 있다. 벌을 죽이는 것으로 정말 벌금을 물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집에서 식사하다가 벌을 죽였다고 해서 진짜 발각되어 벌금을 무는 경우는 많지 않겠지만 5만 유로까지 책정된 벌금의 무게는 벌을 죽이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묵직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야외 식당에서 벌을 죽이려 하다가는 주변에 깔린 시민경찰들로부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환경보호운동가들이 많은 독일에서 동물에게 함부로 행동하다가는 호된 가르침을 받게 되거나 그냥 경찰서행이다.
우리 집 발코니 테이블 위에는 벌이 기피하는 로즈메리를 올려두었다. 음식 냄새나 달콤한 케이크 냄새를 맡고 찾아온 벌은 식탁 위를 몇 바퀴 돈 후에 로즈메리의 냄새를 맡고 날아가 버린다. 물론 강성인 놈들은 로즈메리쯤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왱왱 데는데 그러면 차려놓은 음식을 모두 들고 우리가 실내로 피해야 한다. 맘 같으면 파리채로 딱 때려잡거나 식사 끝날 때까지 유리컵 속에 가둬 두고 싶다. 심지어 누군가는 벌 때문에 정원에서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없음에 지쳐서 벌이 기피하는 식물을 마당에 잔뜩 심었는데 벌 보호에 앞장서던 이웃이 밤에 몰래 정원에 침투해서 (독일은 벽이 없다) 심겨 있던 식물들을 모두 뽑아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년 우리 아파트는 비둘기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반상회에서 이 안건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했었는데 여러 가지 해결법 중 천적인 매를 활용해 비둘기를 퇴치하는 방법이 제안되었다. 매 조련 업체에 연락하면 조련사가 매와 함께 찾아와서 정기적으로 아파트 주변에서 매를 풀어놓아 자연스럽게 비둘기 수를 급감시키는 친환경 신종무기란다. 돈은 들겠지만 자연에 피해를 주지 않고 생태계 원리에 따라 비둘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에 이 방안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했다. 80세가 넘으신 주민 한 분이 당신이 어렸을 때는 비둘기가 오면 새총 쏴서 다 내쫓았다고 하시며 이 안건에 대해 기막힌 마음을 표현하셨다. 반대 의견은 아니었고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에 대한 한탄 정도로 들렸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데다가 얼마나 자주 매를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해서 장고의 토론 끝에 이 방법이 끝내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웃들이 최대한 환경친화적인 방법으로 비둘기를 퇴치하려 애쓰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서구권은 일찍이 인간중심 철학이 등장하여 동물을 열등하게 보는 인식론을 펼쳐 왔지만 이제는 동물권에 대한 담론 및 인식이 가장 발달되어 있다. 독일은 2008년에 법에 ‘동물은 사물이 아니다'라고 쾅쾅! 대못을 박았다. 이렇게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발달한 환경에 살면서도 늘 성적이 저조했던 나의 동물 감수성이 T 학생 덕에 눈을 떴다. 풀 한 포기, 벌 한 마리, 말 못 하는 동물들 모두 생명일진대 사람이 먼저라며 고집부리며 굳이 그들의 권리를 외면하는 못난 짓은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나온 일종의 폭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 자체도 중요성하지만 동물 감수성이 예민한 세대들과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도 애써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배워도 그만 안 배워도 그만인 것을 가르치지만 학생들은 나에게 꼭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 동물감수성에 대해 수혈을 받고 나니 이 세상에 조금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된 듯해서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