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다니고 있는 대학원 수업 과정 중에 "신학입문과 글쓰기"라는 과목이 있다. 과제로 올렸던 글을 컴퓨터 밖으로 나와 한번은 숨쉬게 해주는게 어떨까 싶어 브런치에 옮긴다. 찾는 이 없는 곳이라, 컴퓨터에 있으나, 여기 브런치에 있으나 잠들어 있는 건 같은 처지일거다.
교회에는 "은혜"가 넘친다. 장로님의 "은혜"로운 기도 시간과 찬양대의 "은혜"로운 찬양 뒤에는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가 이어지고,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 앞에 계신 목사님에게 성도들은 "은혜" 많이 받았다고 인사를 나눈다. 성도 간에 다툼이 생기면 누군가는 "은혜"롭게 하자고 이야기한다. 부흥강사 목사님의 쉬고 걸걸한 목소리를 “은혜롭다”고 하고, 감동적인 찬양을 들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교회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성경이 의미하는 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은혜로움”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며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개역개정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찾아보니 291회 사용된다고 나온다. 빈도로 볼 때, 성경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이지만, 성경 어느 구절을 보아도 목사님의 거룩해 보이는 음성이나 화려한 기도, 또는 우리의 감정을 가지고, 은혜받았다, 은혜롭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반대의 상황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자 회당 안에 있던 자들이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변화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은혜가 감정적인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은 뒤집어졌다고 나왔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감정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고, 감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우리의 반응일 뿐이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은혜롭다, 은혜가 없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기준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여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감정은 매우 주관적이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은혜의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은혜는 매우 실체적이고, 변화를 이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예수님)의 위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표현한다. 복음서에 기록된 은혜라는 말은 마치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매우 구체적인 실체인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살린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할 때,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은혜를 받은 무리는 밭과 집있는 자들이 그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에 사랑을 만들고,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킨다.
은혜는 아무런 보답없이 베푸는 긍휼이나, 받을 자격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의 감정이 주인되어서 내가 판단하는 은혜가 아니라, 모든 일에 감사로, 우리 삶의 변화로, 날마다 베푸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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