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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thew Dec 21. 2022

아버지를 닮길 ...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몇 달이 지나 아버지의 직장 후배인 현의송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농협 동인회지에 아버지 추모글을 올렸는데, 잡지를 받아보았냐고 확인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시골에 사는 어머니에게 몇 차례 확인해봤지만, 잡지를 수령하지 못해  결국은 동인회 사무실에 연락하여 동인회지를 받아보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알려주셨던 연락처로 현 선생님께 부고 소식을 전했을 때, 어떤 방법이든 아버지를 추모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동인회지에 추모의 글을 올려 그 약속을 지켜주셨다.


성실하게 88년간의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 육 남매를 키우시며 그 삶의 무게에 지쳐 힘들어 지칠 만도 하셨을 텐데 돌아가시기 몇 년 전까지도 다른 자식들이 부담될까 걱정하시며 아픈 자식을 돌보기 위해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오셨다. 추모글을 읽으며, 집에서와 같이 직장에서도 고지식할 정도로 성실한, 정직한 삶을 살아오신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어머니 표현대로 "재미도 없었던 분이지만, 자꾸 그분이 기억난다."  


직장에서의 나의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는, 아니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미련해 보이더라도 나의 삶이 다른 이에게, 하나님께 그렇게 기억되면 좋겠다.




고 차상환 선배님! 평안히 잠드시기를 기도합니다.

- 현의송


필자가 농협생활하는 동안 가장 존경했던 고 차상환 선배를 1975년 어느 날 농협중앙회 공제부의 기획역으로 발령받아 처음으로 뵙게 되었다. 기획역은 과장급이지만 보직이 없이 과장을 보좌하는 자리다. 첫인상이 매우 인자하게 보이고 인사에 다소 불만을 갖고 부임한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인품에 감동을 받았다. 농협생활 40년을 지내면서 많은 분의 협력과 도움으로 업무를 추진했지만 공제부 기획역으로 차상환 선배와 함께 근무한 2년을 가장 보람 있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 당시는 공제 업무의 무리한 추진으로 민원의 발생이 많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규정 개정 등의 일로 차상환 차장의 조언을 받아 업무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제 규정의 탄생 배경을 찾아 올라가 보니 일본 전공련의 일본어 자료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도 시작했다. 농작물 재해보험 시행을 위한 데스크포스팀을 구성되고 당연히 기획역인 필자가 담당하게 되었다. 주어진 자료는 그 당시 재경부 이재국의 과장급 서기관이 일본의 농작물 재해보험제도를 요약한 자료를 농렵에 주고 이를 기초로 도입할 것을 정부가 요청했던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차장과 나는 일본 농작물 재해공제조합연합회에 1개월간 연수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당시는 여권발급을 위해서는 농협중앙회의 정관 전부를 여권과에 제출하는 등 매우 번거로운 일이 다수 발생했다.


여권신청을 하면서 골롬보플랜의 하나로 일본 정부에 협조 요청하는 문서도 첨부했다 골롬보 플랜은 아시아태평양국가들의 경제발전계획을 논의하고 개발에 대한 기술적 재정적 원조를 제공하기 위한 계획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일본의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니 일본전국공제농렵연합회(전공련)임원급의 수리역 인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임원급의 고위직이 우리 일행을 맞이해주는 것을 보고 우리의 공제부가 생각하는 차상환씨의 차장급의 대우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공제나 보험분야에서는 수리역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 하는점에 놀랐다. 한달 간의 숙박처로 동경에 있는 일본농작물재해보험조합의 기숙사에 두고 일본정부의 공직자 등의 강의와 현장 견학 등으로 진행되었다. 현장연수를 위해 교토와 인근 농촌지역도 관광했다.


한달간 두사람의 경비인 엔화를 일본의 동경의 시중은행 지점에 차상환선배의 이름으로 예금해 두었다. 어느날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창구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창구 여직원이 구루마상 구루마상하고 부른다 한자 차(車)는 일본어로 구루마이기 때문이다. 그후 차 선배와 나는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웃은 적이 자주 있었다.


공제업무는 농협조직에서 상호금융이나 농협연쇄점 사업보다 먼저 시작되었으며 우리의 농협조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공제사업은 고도의 홍보와 세일즈를 토대로 추진되었으며 직원들에 대한 세일즈교육이 농협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짐으로써 농협사업 전반에 대한 선도적 역할을 했다. 공제업무는 막대한 건수의 중앙 집중적 업무처리가 불가피하므로 1970년부터 KAIST의 용역에 의해 전산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농협 전체의 전산처리시스템 도입이 타 금융기관에 비해 비교적 빨리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 농협의 전산업무개발 담당직원들의 해외연수를 위해 10여년 이상 전공련의 아쓰키센터에서 연수를 실시할 수 있었다.


1974년 국무총리 지시에 의해 서울대를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서울음대와 사대부속초등학교의 부지를 매각키로 했다. 이때 정부의 고위직 인사가 농협공제부에서 강남에 부지를 물색한다는 말을 들었는지 농협에 을지로 부지 모두를 매수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농협중앙회는 아마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받아들여 공제운용자산으로 매입하게 되었다.


그후 1980년대 서울시가 공제부 소유 을지로 부지를 녹지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양재동 땅 4만여평과 맞교환하자고 요구가 있어 이를 수용했다. 이후 양재동 부지는 농협중앙회의 매우 상징적이고 중요한 종합유통센터와 전산정보사업본부는 물론 농협중앙회 본부 건물로 사용코자 신축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현대자동차 그룹에 매각하게 되었다. 이후 고 차상환 선배는 1980년 공제부장으로 승진했다. 그 당시 농협중앙회의 경영이 매우 어려운때에 전 직원이 농특산물을 직접 판매하는 등 경영개선활동을 하던 때에 중앙회 각 부처에 있는 기금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공제 기금도 일반 회계 기금과 통합하기로 내부 결정하고 공제부의 협력을 지시했다.


이때 고 차상환 선배는 공제기금은 농협 자체의 소유가 아니고 공제 계약자의 소유라는 이유로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끝가지 고수했다. 1982년 정부가 6.24조치를 통해 대폭적인 금리 인하를 단행했고 이 여파로 농협은 사상 초유의 적자결산이 예상되고 경영위기가 심각했다. 당시 농협중앙회장은 농협의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공제기금의 일부를 농협중앙회의 수익으로 처리하자는 생각이 있었으나 공제부 즉 고 차상환 선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농협중앙회 임원들의 운영방침과 방향에 공제부의 창립멤버로서 소신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 경영층의 미움을 샀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매우 드문 사례이지만 중앙회의 부장급이 서울시내의 지점장으로 자신의 소신 때문에 죄천되는 사례를 발생했다.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필자는 반평생을 농협조직에서 근무했다. 농협을 빼면 내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농업과 농협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신토불이 테마의 미술 작업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고 차상환 선배와 같이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수 많은 농협 동인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농렵 조직이 발전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 차상환 선배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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