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부모님께서는 집안 사정에 비해 저희 형제에게 꽤 많은 지원과 투자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부모님은 잘 모르는, 부모님께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있었지요. 대부분은 다 잊었지만 꽤나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아이템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계몽사에서 만든 <디즈니 그림 명작>입니다. 이름은 몰라도 책 표지 몇 개만 보면 '이거?' 하실 분이 꽤 될 겁니다.
<디즈니 그림 명작>은 1979년에 계몽사가 디즈니와 계약해서 내놓은 60권짜리 동화책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디즈니 장편 만화 신데렐라의 축약판, 재크와 콩나무 같은 유명 동화의 등장인물을 미키 마우스와 구피로 바꾸는 등.. 당시 아이들에게는 세련미가 철철 넘치는 책이었지요. 처음에는 친구네 집에서 봤고, 방학이면 놀러 갔던 고모네 집에 사촌들이 읽었던 책을 정말 열심히 봤지요. 고모네 집을 나오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바로 이 책을 못 본다는 거였으니까요. 그래서 제게 '디즈니 그림 명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97년에 저작권 종료로 절판된 이 책이 2019년 12월에 복간본으로 나와서 구입했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자 마자 바로 2차 구매자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한 달을 기다렸는데 1월 말에 온다던 책은 제작/배송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지연 배송] 안내만 왔습니다. 석달 만에 드디어 책이 도착을 해서 딸아이와 몇 권을 함께 읽었습니다. 삽화의 색감을 개선하고, 맞춤법을 바꾸고(예를 들어, '읍니다'를 '습니다'로), 책 커버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등 복간본답게 개선을 했더군요.
30년 만에 다시 읽어본 그림책은 저를 다시 소년으로 만들었습니다. 마법사 몰래 마법모자를 쓴 미키, 101마리 달마시안, 시골쥐와 서울쥐.. '집에 가면 못 읽는다'는 생각에 그랬는지 몰라도 정말 재밌게 읽었던 그때 그 소년으로 말이지요. 그래도 숨길 수 없는 80년대 감성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리임'이나 '벙어리' 같은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단어도 보였습니다. 가끔은 큰 따옴표가 있을 곳에 < > 괄호로 표기된 곳도 있어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이런 복잡한 느낌이겠지요?
다행히 딸아이도 재밌어합니다. 아내도 이제 제법 글을 읽는 아이에게 딱 맞겠다며 좋아하네요. 한동안 저녁에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은 이 녀석이겠지요. 제 결핍의 경험도 채워지고, 딸아이에게는 추억의 경험이 채워지길 바랍니다.
Small things often.
* <재크와 콩나무>의 등장인물을 디즈니 캐릭터로 바꾼 <미키와 콩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