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작년이 떠오릅니다.
퇴사 후 한동안 정체성 혼란을 겪었는데요...
17년을 몸담았던 공직을 떠나 이젠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던 어느 날 아침. 직장으로 학교로, 가족 모두 떠나 홀로 남겨졌던 그 날 아침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집에 남겨진 난 누구이고, 여긴 어디인지. 왜 난 여기에 홀로 있는 거고,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었고, 홀로 방황했습니다.
퇴사하고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알지만, 직장 다닐 때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직업이 나였고, 내가 직업이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일체가 공(空)하다'는 말을 합니다. 물질세계는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붕괴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거칠뿐, 영원한 것도 없고 '이것이 실체야'라고 말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객관적 시각에서 보면, 저란 사람은 여차저차하여 공무원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공부를 하게 되었고,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고 인연따라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무원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인정을 하고,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도 하게 되고, '내가 공무원이다'란 의식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공무원이 되었다는 사건은 타인의 부러움, 인정, 안정된 생활, 심지어 공무원으로 가지는 의식을 일으켰습니다. 사건이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일으켰고 그것들이 제것이 되어 저의 자존감이자 정체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저 공무의 일을 하는 사람일 뿐이었지만, '공무원이다'라는 말에 녹아든 각종 편견과 관념, 세상의 생각들을 받아들여 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오랜 습관은 중독성이 있어서 쉽게 고치기 어렵습니다. 모든 걸 놓아버리겠다는 각오로 퇴사한 저였지만, 퇴사 후 첫 아침은 그런 각오가 무색할 정도로, 다시 예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다시 돌려놓으라고 아우성치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되돌아보면 그때 저의 상태는 뭐랄까요. 오랫동안 저를 상징했던 소중한 물건을 잃은, 그런 사람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하고 깔끔한 갑옷, 영원히 내 거라고 장담했던, 내게 많은 것을 주던 갑옷을 상실한 사람의 마음이었던 거죠. 그래서 그랬는지, 집착의 크기만큼 현실로 맞이한 그날 아침의 당혹과 상실의 폭은 감당하기 어려웠던것 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담담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그 갑옷이 더 이상 제 자존감이나 정체성도 아니고, 안전한 방패막도 아니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이런 관점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땐 그게 진실이었어요. 하지만, 확실했던 건 그 갑옷이 튼튼하고 무거웠던 만큼 저를 자유롭게 하진 못했습니다.
괴로운 일이 생길때마다 불교의 '공(空)'에 대한 이야기를 펼칩니다. 괴롭다는 건 눈이 감겨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실체는 공한 것이므로 괴롭다고 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식상 한계로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불교의 공(空)도 같은 맥락에서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공(空)'에 대해 얼핏, 힐끗 한번만이라도 마주치고 나면 더 이상 같은 문제 때문에 괴로울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이젠 엉뚱한 것에서 자존감이나 정체성을 찾지도 않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안정에 대한 신화'를 더 이상 찾아 헤매지 않으니까요.
삶이 무겁고 존재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연기적 관점에서 실체가 공하다는 것을 얼핏, 슬쩍 본 것만으로도 존재의 가벼움을 느낍니다. 이 가벼움은 본래 있어야할 자리에 있어서 느끼는 편안함이고, 없어도 충분한 충만함입니다.
존재의 가벼움은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