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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Jan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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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망상

누가 내 집에 들어와서, 그것도 내 침실에 들어와서 이런 괴상한 메모를 베개 밑에 처박아 놓았을까. 오늘 아내와 딸이 나를 골탕먹이는 날인가? 둘이서 이렇게 큰 매트리스를 들기는 불가능할 텐데. 애써 덮은 이불을 들어내고 빛이 들어오도록 블라인드를 제쳤다. 그래도 좀 어두워서 방 등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찾아 방문 쪽으로 향했는데 스위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엔 등이 없다. 등이 없는 방이라……. 애초에 등이 없었던가? 아니면, 등이 있었는데 없애버린 건가? 하긴 언젠가 '침실이 밝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도 같다. 그 생각 후에 등을 없애버렸던가. 마침 아침 햇살이 바늘처럼 콕콕 찌르듯 작은 창을 통해 들어왔다. 방 등이 어디로 가버렸는지는 조금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선 그 빛에 의지하여 매트리스를 들어보기로 했다. 매트리스의 모퉁이를 잡고 손목부터 어깨까지 서서히 힘을 들여 이 묵직하고 퉁퉁한 짐짝을 올렸다. 쪽지가 보이지 않아 침대 평상에 오른발을 올리고 두 팔을 번쩍 들어 매트리스가 놓여있던 부분을 살폈는데도 쪽지는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매트리스를 제자리로 놓으려는데, 매트 아랫부분에 하얀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색 때문에 긴가민가했지만 분명히 종이였다. 고약하게도 이런 곳에 쪽지를 숨겨 놓다니. 손과 발, 이제는 머리까지 써서 겨우겨우 종이를 떼어냈다. 그토록 원했던 휴식을 취하기는 커녕 온갖 신경이 다 살아난 것만 같다. 이불을 덮고 종이를 손에 들었다.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펼쳤더니 A4 용지 절반 정도 되는 크기의 종이다. 오늘 서재에서 본 종이와 크기가 비슷하다. 이 멍청한 종이는 도대체 뭐야.


‘이름, 나이, 가족관계 그리고 직업.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아내와 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아내와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지만, 그들은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진저리가 날 정도로 방해한다. 합의가 아니다, 방해다. 내게 오늘이 아닌 다른 날이 있었던가. 서재에서 시작되는 하루, 아침 식사 그리고 이상한 침실. 아마 지금도 침실 문은 잠겨있을 것이다. 내일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전에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

다시 이 방에 들어오게 되었다면... 모든 건 다시 처음부터.’


기분이 묘하다. 노트북이나 스마트 폰을 주로 쓰는 탓에 글자를 적어본 지는 오래됐지만 확실히 내 눈에 익은 내 글씨다. 홀린 듯 자연스럽게 이 방에 들어온 것과는 달리 무겁게 팔과 다리를 움직여 방문으로 향했다. ‘니은’ 모양으로 문 오른쪽에 박혀있는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덜컥하고 열릴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손잡이는 약간 흔들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 방문은 밖에서 잠그는 것이었나? 방은 나를 보호하는 곳인가, 세상을 나로부터 보호하는 곳인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방문을 두드려도 보고 소리도 질러 봤지만 문 밖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내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내가 수민이의 출입을 막으려고 닫은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상황을 떠올리려고 해도 밖에서 문이 잠긴 것은 ‘감금’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좁고 긴 뱀처럼 생겨먹은 창문에 대고 괴성을 질렀지만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 창문이 워낙 높은 곳에 있어 밖을 내다볼 수도 없다. 쪽지 따위는 잊고 잠이나 자야 한다는 목소리가 몸통 안에서 조용히 울리는 것 같다.


순식간에 해가 넘어가고 있다. 바늘구멍 같은 창문 사이로 노을이 비친다. 아마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내가 나를 깨우러 올 것이다. 고급스러운 베이지 색 벽지에 호텔에서나 쓸 법한 침구, 누우면 하늘이 보이는 내 키와 똑같은 길이의 가로형 창문, 자질구레한 가구 하나 없이 온전히 나의 편안함을 위해 만들어진 방. 언제나 내가 꿈꿔왔던 침실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겨우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하고 오늘 하루를 떠올린다.

서재, 식사, 침실 그리고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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