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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Jan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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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망상

오늘은 침대에서 일찍 일어났다. 어제 미처 다 하지 못한 서가 정리를 하기 위해 서재로 갔다. 침실과 서재가 1층에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집에서 굉장히 많은 공간이 오롯이 나를 위한 공간이다. 이정도면 꽤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언젠가 잡지에서 보았던 그 인테리어, 좁은 벽에 꼬깃꼬깃 잘라 붙여놨던 그 고급 인테리어가 이제는 내 발밑에,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잡지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거실에 도착했다. 잡지의 풍경과 똑같은 부엌을 지났고 집 밖으로 얼핏 보이는 여명과 나무 그림자를 감상했다. 의식을 조금씩 깨우며 가벼운 걸음으로 서재에 도착했다. 침실에서 나와 서재에 도착할 때 쯤엔 아득한 꿈의 기억은 떨치고 맑은 이성으로 무장하게 된다.


아내와 딸은 아직 자고 있나보다.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 사이로 가족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침실에서 혼자 밤을 보냈는데, 아내와 수민이는 어디서 자고 있을까? 아침 산책이라도 나간 것일까?

개수를 세기 힘들 정도의 책장. 층고가 높은 이 방을 온통 둘러 버린 책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책이 담고 있는 감정과 지식이 모두 내 방에 수집되어 있고, 그건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온전히 내 것이기 때문이다. 유치한 소유욕을 제외하고서라도 책장에 단정히 놓여있는 책들은 내 삶의 자취를 보여주는, 내 스스로 완성한 전기와 같다. 내 마음이 반응한 것들을 죄다 모아 놓은 것이니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모두 반영한 나의 정신이 저 책장에서 생동적으로 살아있다.


책의 제목을 천천히 훑어보니 잠들어 있던 감정이 반응하면서 살점 아래에 있는 진짜 내가 들뜨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나에게 끝없는 희열을 제공하는 대가로 나는 항상 책장을 부지런히 관리한다. 한 곳에 오래 두면 먼지나 책벌레 때문에 책 상태가 나빠지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기준을 세워 책을 새로 정렬했다. 오늘도 역시 책을 뺐다 꽂았다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정리한 그대로다.’

몇 권을 다시 재 정렬 하고, 핑크색 표지의 책을 마지막으로 제자리에 올려두는 순간 책 장 바깥으로 살짝 튀어나온 하얀 종이를 발견했다.


‘만약 내가 이 글을 다시 보고 있다면 나의 계획은 실패했다. 나는 나를 잃었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버렸다. 허상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실패한 것 같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단편적인 이미지일 뿐. 그 조각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이 단잠에서 깨야한다. 달콤한 꿈에서 익사하기 전에.’


 “아빠, 식사하세요.”

 “여보, 나 얼른 밥 먹고 회사에 갈게. 오늘 할 일이 많아.”

 “여보, 당신 오래 전에 회사 그만뒀어요. 오늘 이상하네요. 얼른 침실에 가서 좀 쉬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시 이 곳으로 왔다. 나는 분명 어제 2층으로 올라갔고, 그곳에 있는 환상적인 침실에 하루종일 갇혀있었다. 아침이 되어 침실 문을 열었을 땐, 2층 침실 따윈 없었다. 나는 1층에 있는 침실에서 나와 서재로 향했다. 더 이상한 건 아내다. 어제 하루 종일 갇혀있었는데 아내는 이상한 기색도 없이 똑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수민이의 인사도 어제와 동일했다. 회사에 가겠다는 나의 말에 아내는 어제와 같이 흥분하지 않고  휴식을 권했다. 내가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아내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내는 두 손바닥으로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내는 뒤늦게 살짝 웃었다. 그런 아내 뒤로 어른의 표정을 한 수민이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침실에 들어왔고, 문은 즉각 잠겼다.

‘내일이 되기 전까지 침실의 문은 잠겨있을 것이다.’


나는 어제 매트리스 밑에서 쪽지를 찾았고, 베개 밑의 지시를 잘 따랐다. 어제부터 ‘오늘’이 시작되기 까지 잠들지 않았다. 새로운 ‘오늘’이 되자 침실 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를 들었고 20분 쯤 지나 서재로 향했다. 나는 어떻게 2층에서 1층으로 오게 된 걸까. 그리고 그 1층의 침실은 어디로 가고, 2층 침실은 왜 다시 생겨난걸까? 베개 밑을 들어보니 어제 봤던 그 쪽지가 그대로 있다. 매트리스 밑은 다시 힘들여 볼 필요는 없겠지. 이런 생활을 얼마 동안 계속 한거지?


아내와 아이에 대한 사랑, 완벽한 아침에 대한 만족감이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전부가 된 것이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내와의 연애시절, 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만 내 머릿속에 없다. 아내는 늘 정갈한 식사를 준비했고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차림으로 아침에 나타났다. 딸은 늘 갑자기 고개를 내밀며 장난을 걸었다. 그게 내 가족에 대한 내 모든 기억이다.


다시 한 번 매트리스 밑의 종이를 끄집어냈다. 이름과 가족관계라…….

내 이름은 최문철. 아무리 미쳐버렸다고 해도 내 이름을 잊을까. 혹시라도 잘 못 기억하고 있을까 열심히 되뇌어 봤지만 분명 ‘최문철’이 맞다. 수없이 많은 어미를 붙여 불린 내 호칭을 똑똑히 기억한다.

문철아, 문철 대리, 문철이 이놈아, 최문철씨, 최문철!


‘최문철’이 확실하다. 이제 출신을 떠올려보자. 그것도 어렵지 않다. 나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고 학창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지금도 부모님은 포천의 작은 집에 살고 계신다. 최근에 그 곳에 간 적이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부모님과의 기억 속에는 내가 그분들과 함께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채소 코너를 자꾸 빙빙 도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서 라면과 과자, 맥주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어머니의 카트에 던져 넣었다. 아들의 쇼핑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아쉬운 듯 한숨 섞인 신음 소리가 어머니의 입에서 가늘게 새어나왔다. 장보기가 끝나고 나는 한 손에는 터질 지경에 다다른 종이 백을, 다른 한 손에는 어머니가 미리 챙긴 장바구니에 물기 가득한 찬거리를 가득 안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앞서 집으로 향하시고 나는 뒤에서 짐을 들고 따라갔던 것 같다. 꽤 더운 날이었는데 뒤 돌아보시며 ‘같이 들까?’하는 어머니의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혼자서 짐을 들고 가는데도 연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이 열린 듯 땀을 흘리고 걸어가다 가까스로 아파트 현관에 도착했다.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시는 아버지 뒤로 문이 닫힐 새라 양손의 장거리를 단단히 들고 바쁘게 쫓아 들어갔다. 마침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를 탔고 15층 버튼을 누르는 아버지의 두껍게 굽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거울을 쳐다보았다.


내 기억 속에 떠오른 거울에 비친 ‘최문철’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다. 지금의 내 얼굴을 거울로 확인한 기억도 없지만 분명 최문철의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다. 나는 번듯한 집에,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이 있는 가장이다. 나보다 젊어 보이는 것 같지만 며칠은 굶은 듯 퀭한 눈에 처지는 피부, 근육 없는 비틀어져버린 몸뚱이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더러운 냄새가 날 것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처량한 행색은 분명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 기억 속에 문득 나타난 거울 속의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거울 속의 그 최문철은 열린 현관문을 따라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본인이 골랐던 과자와 맥주를 한가득 가슴에 안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문철아, 장 봐온 걸로 밥 먹어야지.”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어딘가 내게 익숙한 펜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가 글을 썼다가를 반복했다.


‘최문철’이 그린 그림에는 어떤 집의 평면도가 대강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거실과 부엌, 그리고 부엌과 별도로 존재하는 다이닝 룸과 서재. 그리고 그 평면도와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침실’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커다란 방이 그려져 있다. 아무것도 없이 침대만 있는 방.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비난받지 않을 수 있는 그만의 침실이. 그리고 벽을 가득 채운 화려한 인테리어 사진들.


평면도 밖에는 두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 아내의 모습에는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주방 쪽으로 화살표를 그려 놓았고 딸 옆에는 ‘수민’이라는 이름까지 적혀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두 동강이 난 A4용지 쪼가리에 그가 원하는 일상을 구구절절이 메모해 두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서재로 향한다. 어린 시절부터 읽은 책을 한 데 모아 두니 양이 상당하다. 모든 책의 제목을 찬찬히 살펴보며 지난 과거를 회상하고 지금 현재에 다다를 수 있었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서재에서 하루를 시작하던 중에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의 인사로 따뜻한 아침이 열린다. 아내는 신선한 찬을 여럿 준비해 두었고, 딸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최문철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히죽거리다가 맥주를 두 캔 비우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시작되었던 것 같다. 서재에서의 내 아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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