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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Mar 25. 2021

산책 다녀올게요

제주도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

숙소는 서귀포에 있었다. 우리나라 가장 남쪽, 그곳의 바다와 풍경을 누리고 싶어서 서귀포로 갔다. 남편은 아직 잠에서 깨기 전이고, 눈을 반만 뜬 강아지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 길을 나섰다. 오전 6시 30분,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을 바라보며 신발 끈을 조였다. 걷는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차 한 대가 지나갔다. 딱 그 속도만큼의 바람도 곁을 지났다. 넓게 펼쳐진 회색빛 하늘, 아스팔트, 건물들. 회색빛 풍경에 맞춰 걷다 문득, 구름색을 입은 숲길로 들어서게 됐다. 



우연히 들어서게 된 이곳은 서귀포의 작가의 산책길. 이중섭 미술관을 시작으로 기당미술관, 칠십리 시 공원, 정방폭포, 소암기념관까지 약 5km 정도 걸으며 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이다. 원한다면 해설가와 함께 걸을 수도 있고, 산책길 곳곳에선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작은 공연도 감상할 수 있다. 도심지와 해안길, 숲길을 두루 걸을 수 있는 완벽한 제주의 산책로다.  숙소 맞은편에 있는 나무숲 사이로 슥, 들어갔는데 '작가의 산책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내가 걸은 길은 긴 코스 중 칠십리 시 공원 근방의 숲길 일부. 어쨌거나 이건 나중에 알게 된거고 이날은 이런 사전 정보를 모르는 상태로 그냥 툭툭, 걸어들어갔다.




혼자서 낯선 길을 걷다 보면 으레 불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길을 잘못 들어 먼 곳으로 가게 되지는 않을까, 다시 돌아오는 길이 힘들진 않을까, 모르는 길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진 않을까. 혹은, 나와봤더니 길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너무 멀리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날이 흐려서 그런가. 숲길이 어둑어둑해서 그런가. 마음이 마냥 맑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 가족이 편히 쉬고 있으니까. 계속 마음이 무거우면 가족에게 돌아가면 된다 생각하며 걸었다. 






이른 아침에도 천지연 폭포는 열심히 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지난밤, 알록달록 화려한 조명에 둘러싸여 많은 관광객의 찬사를 받던 곳. 조명도 사람도 없었지만, 폭포는 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걷는 길에서 폭포가 보이진 않았지만 쏴아아 하는 시원한 소리로 부지런한 풍경을 상상했다. 짧은 숲길을 지나 칠십리 시 공원에 들어서자 운동하는 시민 몇몇을 만났다. 내겐 이곳이 여행지이지만 그들에겐 매일의 일상인 곳. 최대한 외지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묵묵히 걸었다. 


숲길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걷는 날 날씨와 분위기도 중요하다. 어떤 감정으로 어떤 상황에서 걷는지에 따라 같은 숲길이라도 다른 숲길처럼 걸을 수 있다. 그날의 분위기가 길에 차분히 내려앉으면 내가 걷는 길이 좀 더 풍요로워진다. 나무와 꽃과 흙도 좋지만, 그 사이사이의 공간에 내 마음이 채워진달까. 마음을 주기도 하고, 정화해서 되돌려 받기도 하면서 그렇게 걷는 게 숲길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날은 예정에 없던 낯선 길을 걸으며, 숙소에서 자고 있을 가족에게 위안을 받았다. 내가 어떤 길을 걷건 어떤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건 간에 가족은 늘 같은 자리에 있으며 내가 돌아가면 따뜻하게 맞아줄 거라 생각하며 걸었다. 나이가 들면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고, 혼자서도 완전히 행복해질 줄 알아야 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함께가 좋다. 혼자서 즐겁기 어렵고, 혼자서 행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나와 걸으면서 곧 함께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공원길을 지나 어느새 칠십리교에 다다랐다. 이 다리를 건너면 총 3시간 30분이 걸린다는 작가의 산책길을 다 돌아보게 될 것이고, 그럼 이날 세웠던 여행 계획에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길 터. 아쉽지만 오늘은 이까지. 왔던 길을 돌아 숙소에 도착하니, 남편과 강아지는 이미 잠에서 깨어 있다. 나란히 엎드려 티비를 보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서귀포에 가면 혼자 조용히 이 길을 다 걸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따뜻한 낮에, 해맑은 어떤 날에 도심과 해안과 숲길을 걷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나서 포근한 계절이 오길 기다렸는데, 마침 그해에 전염병 사태가 터졌다. 가지 못했던 길이라, 자꾸 마음 한 켠에 남아있는 산책길. 2021년엔 제주시에서 맘먹고 길을 정비한단 기사를 보니 마음이 콩콩 뛴다. 올해는 가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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